책소개
그린비에서 출간하는 『카오스의 글쓰기』(모리스 블랑쇼 선집 8)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역되는 책으로서, 블랑쇼의 후기 사유가 단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책이다. 마치 하루하루의 일기를 쓰듯 단상 형식으로 구성된 그의 글들은 그의 삶이 드러나지 않는 은거의 삶이었던 것처럼, 그의 언어 역시 현실을 설명하고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구성적 전망의 언어가 아니고, 현실의 맹점을 밝혀 보이는 명철하고 비판적인 언어도 아니며, 드러나지 않는 침묵의 언어임을 보여 준다.
I. 서론
모리스 블랑쇼는 작가이자 철학자로서 이 시대에 하나의 사상적 흐름을 형성하였다. 그는 ‘바깥의 사유’를 전개했으며 푸코, 들뢰즈, 데리다부터 아감벤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카오스의 글쓰기』는 블랑쇼의 후기 사유를 대표하는 저작들 가운데 하나이자, 그의 사유 전체를 마지막으로 집약 시켜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카오스의 글쓰기』는 일기를 쓰듯이 글이 파편적으로 구성되어 전체적 윤곽이나 주제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묶어내는 일은 가능해 보이지도 않고, 블랑쇼도 원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본 고에서는 흩뿌려져 있는 블랑쇼의 사유를 — 완전하게 분류하여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 『카오스의 글쓰기』를 짚어 올라가며 그의 언어를 통해 다시 한번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블랑쇼의 언어
(1) 카오스 désastre
‘désastre’라는 단어를 어원학적으로 ‘astre(별, 천체)’에 부정 접두어 ‘dés(dis)’가 결합되어 구성되었고 ‘astre’의 어원은 그리스어 ‘astron(우주, 천체)’이다. 따라서 별들의 궤도 이탈, 우주의 질서를 벗어나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블랑쇼와 관련해서는 조화로운 질서, 즉 코스모스(cosmos)로부터 벗어나 천체의 질서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공간, 코스모스의 잉여이며, ‘바깥’을 의미하기도 한다.
블랑쇼가 카오스의 특성으로 말하는 것 중 하나는 부재로서의 존재이다. 현전과 부재가 겹쳐진 — 구분되지 않는 — 제3의 공간에 있는 카오스는 현전하지만 물러나 있는 형태로 존재하기에 현전도 부재도 아니다. 물러남(withdrawal)은 의미의 부재를 뜻하며, 이는 비가시적이고 드러나 있지 않다. “카오스는 분리되어 있으며, 가장 멀리 분리되어 있는 것” 으로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바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