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시종일관 철저성과 산문성으로 분위기를 이끄는 토마스 만의 이 작품은 지성을 바탕으로 작가로서 그가 지향하는 문제점들을 '토니오 크뢰거'에 감정이입시켜 토로한 자서전적 소설이다. 예술가로서 평범한 생활을 하려 하지만 그 경게는 너무 뚜렷해서 양쪽을 다 포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경계를 인정하며 관찰자로서 자신의 예술적 삶 속에서 안정을 찾는다.
인상적인 소설을 읽을 때면, 살면서 나만의 소설 한 편을 완성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고, 아름다운 시를 낭독할 때면, 다른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시 한 편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오른다. 예술의 월계수 잎은 언제나 나에게 매력적이었으며 여전히 살면서 문뜩 간절하게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아마도 토니오 크뢰거는 온전하게 시민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예술의 월계수 잎 하나를 소유하고자 하는 나를 딜레탕트라고 비판할 것이다. 나의 모습은 명예로운 군복을 입고서 예술까지도 맛보고 소유하기 위해 자작시를 지어 낭독하는 소위의 모습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토니오 크뢰거는 예술가의 마음과, 딜레탕트가 ‘따뜻한 마음’과 ‘거짓 없는 도취’ 가운데서 꿈꿀 수 있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의 이름 자체에서 예술성과 시민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그의 이름처럼 시민성과 예술성의 조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시민성을 완전하게 배제한 것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는 예술가의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사회와의 갈등을 미술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예술가로서의 삶과 갈등, 그리고 예술에 대한 딥다이브를 통해 인간의 내면 세계와 감정의 복잡성을 탐구합니다.
주인공인 토니오 크뢰거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예술을 통해 표현하려는 예술가입니다.
이 작품이 토마스 만의 자전적 노벨레라고 불리는 이유 중의 하나가 토니오의 태생이 토마스 만과 유사하기 때문인데, 예술성과 시민성 사이에서의 고뇌는 바로 토마스 만이 생애에 걸쳐 했던 고민이다. 이는 작품이 탄생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의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고민이다. 사회에 순응하고 사회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서 삶을 영위하면서도 예술가들의 창작품에 찬사를 보내며 우월성을 인정하는 나와 같은 일반 시민들에게서 한스 한젠의 모습이 보이고, 사회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면서도 자신이 태어난 사회에 애정을 가진 예술가들에게서 토니오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뇌하고 있을 현대사회의 토니오들이 더 이상 길 잃은 시민으로서 예술성과 시민성 사이에서의 방황을 멈추고 그 갈림길 위에서서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지 말고 수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토마스 만의 예술가로서의 숙명과 예술의 본질을 다룬 자전적 단편소설로 알려져 있는 ‘토니오 크뢰거’는 사실 공대생이 읽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는 책이었다. 예술가와 평범한 소시민의 삶에 대한 심오한 정의를 내려가는 토니어 크뢰거의 말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흥미로웠다. 토니오 크뢰거는 자신만의 이분법을 통해 세상의 사람들을 예술가와 평범한 소시민으로 구분했다. 그에게 있어 예술가는 남들보다 먼저 인식하고 끈임없이 깊게 관찰해야 하는 저주 받은 존재였고, 평범한 시민은 기존의 규칙과 질서를 잘 이해하고 완벽하게 융화되며 행복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였다.
토니오 크뢰거라는 어느 남자의 일생보다는 한 시인의 삶을 엿본 기분이었다. 작가가 의도하는 것 역시 개인의 일생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가지고 있거나 가져야하는 감정을 말하려는 것 같아서 만족스러운 구성이었다.
이 소설을 보다보면 계속해서 느껴지는 것이 바로 토니오 크뢰거 자신이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열망이다. 토니오는 자신의 문학을 사랑하고 지켜봐주는 이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에게 아름다운 것은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어떠한 음울함이나 첨예한 감수성이 아닌 명랑한 순수함이다. 이 것이 토니오의 인생이 고독해 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중간에 보면 화가인 여자친구와 길게 대화를 하는 내용이 있는데 대화라기보다는 토니오의 일방적인 어쩌면 자기 비하라고도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마냥 어렵고 다른 나라 이야기 같지만 사실 하나 하나 읽다보니 공감할 수 있는 말이 많았다.
<토니오 크뢰거>는 전 대법관인 김영란 교수가 자신의 <책 읽기의 쓸모> 책에서 단 한 권의 책으로 꼽은 책이다. 이 중편소설은 김영란 교수를 세상을 관찰하고 끝없이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게 했다.
이 책은 작가 토마스 만의 수필이라고 해도 될 만큼 소설에 자신의 인생이 녹아있다. 세상에서 벗어나 고독한 상태로 세상을 관찰하는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의 생각을 담담히 따라가며 나는 그와 참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세상 사람들의 무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함께 말하기 보다는 바라보는 것이 좋다. 가끔은 내가 특이한 사람인가(또는 여자인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이것은 자기애의 과잉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생활 속에서 나는 대다수의 사람과는 다른 나를 종종 발견한다. 이를테면 나는 손톱이랑 발톱에 뭔가를 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본연의 수줍은 분홍빛 손톱을 가리는 진한 매니큐어나 젤 네일, 손톱에 붙이는 보석 등에 전혀 관심이 없단 말이다.
열등감으로 인한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언젠가 부유하게 살면서 공부도 잘하는 아이의 리더십을 부러워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부러워했던 것은 단순한 리더십이 아니라 그 아이가 교실 안에서 휘두르던 막강한 권력이었다. 그 아이의 권력은 다른 아이들의 행동을 알게 모르게 통제할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 아이 앞에서 서열을 갖추기 바빴고, 그 아이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 그런 권력에 잘 휘둘리는 편에 속해서 그 아이를 참 많이 부러워했다. 그런데 부러움도 부러움이지만 권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상당한 열등감 또한 같이 느꼈다.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는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소명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작품이지만 내가 어릴 때 겪었던 심리적인 갈등 혹은 지금도 문득 떠오르는 열등감을 들추어낸다. 주인공 토니오는 자신이 가진 예술적 자질과 그에 반하는 시민적 자질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이 때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토니오의 심리적 갈등이 나 조차도 형용하기 어려웠던 경험과 감정을 문학작품에서 재확인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예술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일까? 방 한 칸에서 어떠한 대상에 매료되어 작품 활동에만 몰두하는 가녀린 감성을 지닌 예술가들, 생계유지를 하기에는 배고프고 외로운 예술가들 등등.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안정된 시기보다 사회변혁에 박차를 가해야할 필요성을 느낄 때에 현실의 억압과 비탄을 뒤로 하고 작품 활동에 매진하게 된다.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들에겐 전통과 인습에 순응을 해야 하는 시민사회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으며 이를 동경하고 받아들이려 하지만 결코 순응할 수 없다. 이렇게 불안정한 시기에 가녀린 감수성이 최절정에 이르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술가들의 숙명이다.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는 이러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작가 토마스 만은 19세기 전통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시기를 살았으며 이러한 그의 삶은 토니오 크뢰거라는 주인공에게 잘 투영되어 있다. 토마스 만은 실제로 참정의원인 아버지로부터는 냉철한 사고와 도덕적인 기질을 이어받았고, 혼혈 어머니로부터는 감각적이고 자유분방한 예술가 기질을 물려받았다.
아! 제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저는 제 자신을 알리기 매우 두려운 사람입니다. 당신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조금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차차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당신을 처음 접하였을 때 저는 순간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내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 라는 의문에서 저는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위치는 시민인가, 예술가인가……. 물론 저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문학의 본질과 기능을 바탕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성의 회복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마련해주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문학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당신과 같이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처음 당신을 접하였을 때 예술가와 시민 사이에서 갈등하는 당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시민을 사랑하고자 하나 시민이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듯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한스가 되고자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럽다고 말하였지만 당신은 그뿐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당신은 자기 나름대로의 우월성에 빠져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은 예술가, 한스는 시민, 그럼 나는 인간을 사랑하고 문학의 본질을 중요시 여기는 나는? 이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깊게 고민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