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사람들이 자신의 주소를 등록하여 필요한 다른 이에게 교육을 제공하며, 자기가 하고자 하는 공부활동을 기록하여 교육을 위한 의사소통의 네트워크를 만든다는 것이다. 학교 없는 사회를 주장하는 이 책은 공교육의 위기와 사교육 열기가 한창인 한국사회에 학교교육에 대한 성찰과 비판의 목소리가 될 것이다.
‘학교 없는 사회’는 교육 문제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학교 제도 자체가 학생 들의 성장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주입식 교육 방식이나 시험 점수 위주 의 평가 시스템 때문에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교사 들은 수업 준비나 행정 업무 처리에만 매달릴 뿐 정작 교실에서는 무기력하다 고 지적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안교육 모델이 필 요한데, 여기서 제시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홈스쿨링이다.
<서론>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사회철학자 이반 일리치의 저서 “학교 없는 사회”를 읽고 난 소감을 독후감 형식으로 작성하였다. 저자 이반 일리치는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엔지니어였으며 어머니는 유대인이었는데 자라면서 다양한 언어를 습득하였다. 이탈리아 플로렌스(피렌체) 유학하여 역사를 공부하였고 로마 바티칸 그레고리안대학(Pontifical Gregorian University)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하였고 이후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잘츠부르크대학에서 중세 역사를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와 획일화된 교육정책은 문화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미국형 문화에 적응을 강요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학교교육은 라틴아메리카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무능하다는 의식만 심어준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학교교육은 남아메리카의 현실에서는 적절하지 않으며 새로운 교육제도의 실현을 주장하였다.
1. 저자 - 이반 일리히
크로아티아 출신의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1926년 빈에서 출생하였다. 대학 입학 자격시험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치른 후 처음에는 화학과 역사를 공부하였으나 곧 신학에 뜻을 두고 로마의 그레고리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1950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서품성사를 받은 후 다시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교사 및 학자로서 활동하면서 특히 중남미의 봉건적인 로마 가톨릭교회와 한 이불 속에 있는 정치 체제를 호되게 비판하는 등 해방신학 운동에 많은 동조를 하였다.
2. 내용 요약
“산업적 생산양식 자체의 존재방식”이자 “가치의 제도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학교를 철폐하자며 학교의 '혁명'을 선언한 책이다. 일리히는 학교를 통해서는 보편적 교육을 실현할 수 없으며, 개개인의 삶의 모든 순간을 공부하고 나누고 돕는 순간으로 바꾸도록 고양시키는 교육망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교’는 나에게 22년간 신성한 교육의 장소로서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공간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공교육의 붕괴라는 기사를 읽거나 교사의 권위가 떨어져가는 현대사회의 교육의 현실을 접할 때면 학교의 개선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한 심정으로 지금의 학교는 지식정보제공의 독점적 지위를 상실한지 오래이다. 일리치는 학교를 ‘과정과 목적이 혼동되는, 제도화된 공간’이라 칭하며 이 학교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되며 더더구나 평등교육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학교의 존재자체에 대해서 의심조차 해본 적 없던 나에게 일리치의 이러한 주장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교육’ 하면 학교가 떠오르듯이, 학교 없는 교육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학교는 교육자와 학습자가 만나는 공간이지만, 제도의 일부로서의 학교는 다양한 사회학적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학교의 민주적 요소와 가능성이다.
하지만 학교가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학교가 변함과 동시에 사회 전반적으로 혁신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학교와 사회 둘 중 어느 하나만 바뀌어서는 다시 똑같은 전처를 밟기 마련이다.
탈학교주의자들의 고민과 현재의 교육을(학교를) 개선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고민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 방법이 다를 뿐이다. 저자는 제도하에 관리되는 학교, 즉 학벌화를 없애고, 자유로운 교육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제도’ 안에서도 그 일이 가능하고, 어쩌면 더 효율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기 전 ‘학교는 지켜져야 한다.’라는 전제를 머릿속에 새겼다. 그리고 읽으면서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나도 ‘왜 매일 학교에 가야할까?’, ‘일주일에 3일만 쉬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콩나물 시루같은 버스에 몸을 싣고 서서도 꾸벅꾸벅 졸면서 학교에 가면, 바로 보충수업이 시작된다. 0교시 수업을 마치면 정규수업이 이어지고 다시 저녁부터는 야간자율학습을 해야했다. 하지만 학교에 가기 싫다는 생각은 입시위주의 교육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의 교육현실로 인한 빡빡한 스케줄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었지 학교 생활이 싫어 ‘학교를 없애야 한다.’, ‘학교 없는 곳에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일리히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학교에서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학교제도에서 얻어진 분별력으로 학교의 폐지를 반대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유년기라는 장막을 합리화하고, 아동이라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마땅하며, 권위적인 눈을 가진 교사에게 모든 것을 맡겨도 좋은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일리히의 ‘생각’대로라면 학교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은 있으나 그 ‘생각’이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여기서 언급해보고자 한다.
이하 생략
우리는 지금까지 학교라는 것을 우리의 필수 가결한 의무교육의 장소로만 여기고, 학교 내에서만 이런저런 시도를 해가며 교육과정을 뜯어고치는 등의 노력만을 기울였지, 학교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나 역시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주장하는 탈학교사회라는 용어가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치 쇠망치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누구 하나도 감히 공교육의 산실이라 굳혀진, 그리고 삶에 있어서 검증 받은 개인의 능력을 산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라 여기는 학교를 개혁이 아닌 전복의 대상으로 여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우리의 일종의 제도적인 사고방식을 깨고 새로운 주장을 펼치며 우리 교육의 발전적인 새로운 국면을 제시하였다.
저자는 아무리 시대가 달라진다 해도 모든 이들이 똑같은 보편적 교육을 받기는 힘들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이 의견에 매우 공감 가는 바이다. 아무리 공교육이 평등한 교육의 권리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결국에는 교육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아이들이 교육을 효과적으로 받게 되고 학교를 잘 이용하여 자신의 발전을 꽤하는 것이다. 반면 전혀 아무런 교육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던 상대적 빈익층 아이들은 학교에서의 교육은 오히려 더 무의미하고 자신의 적성을 찾기도 전에 교육에 대한 많은 시련을 겪게 되어 학교를 싫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러한 학교교육이 모두에게 동등한 교육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에서 학교교육의 확대는 국가 간 또는 사회 내의 불평등을 고조시킨다.
책에 나와 있던 많은 내용들이 감명 깊게 느껴졌지만 그 중에서도 이 말은 참 뜻 깊게 다가왔다. ‘학교를 학습과 동일시하는 것은 마치 교회와 구원을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이 말은 교회에 나간다고 누구나 다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