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는 T. S. 엘리엇이라는 시인의 시다. 황무지는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죽은 자의 매장, 2부는 사월은 잔인한 달, 3부는 부활제 전날 밤, 4부는 성스러운 숲 이렇게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부마다 화자가 다르다. 첫 번째 부 는 화자인 목사가 무덤 앞에서 기도문을 읊고 있고, 두 번째 부는 연인이었던 캐서린이 죽고 난 뒤 그녀를 애도하는 내용이며, 세 번째 부는 부활절 전야제 로 기독교 신앙심을 표현하고 있으며, 네 번째 부는 자연(숲)을 찬미하는 내용 이다. 각 부의 주제들은 죽음, 상실, 재생, 종교의식, 생명력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잔인한 달" 이 구절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리도 잘 알려진 구절의 책의 내용이 궁금하기 시작해 읽게 된 책이다.
한국의 시집이라면 금방 내용이라도 읽을 수 있을텐데
해설이 없으면 어떤 상황에서 쓴건지 어려운 책이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지만 끝은 평화로운 그만의 세계가 느껴지는 책이었다.
작가는 리듬감있는 불평이라는 말을 했지만 세계문학의 혼란을 만든
이작품은 특이한 작품이에는 틀림없다.
이책을 쉽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주요점을 간단하게만 설명하고 풀어낸다면 희망이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에 현재에 집중할수 없으면 삶도 없다라는 내용이며, 과거와 미래를 끊어버리면 현재도 사라진다인 것 같다. 의미모호 하지 않은가?
시인 또한 그의 철학에 빠져들어 아름다운 현재가 아닌
무의식중에 풀어놓은 황무지의 풍경에 빠지기도 한다.
과거,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계열은 변화와 조화와 통일을 이룬다는 것.
새로운 문명에 대한 시각에 대한 답은 당신이 예상하는 그대로다라는 철학적 의미가 보인다.
작품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작가인 T. S. 엘리엇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20세기 영문학의 많은 부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T. S. 엘리엇은 1888년 9월 26일 미국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나 1927년 영국으로 귀화, 1965년 1월 4일 사망했다. 하버드대 재학 중 쓴 본시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를 비롯해 『황무지』, 『사중주』, 『대성당의 살인』 등 많은 유명 작품들을 남긴 그는 모더니즘(1920년대 일어난 근대적인 감각을 나타내는 예술상의 여러 경향)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극작가, 그리고 비평가로서 20세기 영미 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하던 시기는 낭만시의 전통이 지배적인 힘을 행사하던 때였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시의 전통은 변화된 사상과 사물을 담아내거나 바라보는 데에 적절한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고 영문학은 이제 새로운 문학기법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상황이었다. 엘리엇은 이 같은 시대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시를 세상에 내보임으로써 당시 주류를 이루던 시적 전통을 타파했을 뿐만 아니라 영시의 새로운 장을 여는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이러한 것들이 1922년 『크라이테리언(The Criterion)』지에 실린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황무지]는 동과 서를 넘나드는 무수한 신화와 현란한 인용어구, 의식의 흐름 기법이 어우러져 난해함으로 다가오는 시입니다. 황무지의 불연속적인 구성과 앞뒤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난해함, 일관성이 결여된 듯 한 화자의 목소리를 읽어내면서 시 전체가 파편화된 조각들을 불완전하게 하나로 묶어두고 있다는 인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바로 이러한 시의 모습이 바로 현대 문명 속에서 불완전하고 불안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인간 정신의 불안한 상황과 황폐함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이 이 시를 통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본 결과 그것은 이 죽음의 땅, 황무지에서의 `재생을 위한 길`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시를 읽으며 감동을 느꼈던 점은 한결같은 그의 재생에 대한 굳은 신념과 믿음입니다. 이것은 엘리엇이 일생을 통하여 진지하게 추구한 과제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지금 공유하는 시대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얼마나 시대적 진보가 있는 것일까? 한 시대의 문화 과학적 발전과 더불어 우리는 윤리 도덕적, 신앙적 문제는 어떠한가? 그 시대적 공백 속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얼마나 솔직함과 성실함이 있었던가? 정치적 분열과 경제적 부유와 기술의 변혁 속에 우리의 정신은 재생의 몸부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처럼 많은 물음표들이 저의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저는 [황무지]를 통해 한 시인의 작은 짜임새를 통해 이루어 낸 소망과 의지가 오늘날의 젊은 우리의 혈관 속으로 전해져 오는 간절한 기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황무지`로 그대로 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노력과 헌신의 삶을 통해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으로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인가? 과학과 기술의 혁신적 진보 하에서 진정으로 인간이 누릴 행복과 삶의 기쁨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저는 다시 한 번 제 자신에게도 위와 같은 질문을 함으로써 제 자신을 진지하게 되돌아볼 수 있었으며 저 자신의 진정한 재생을 위한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림을 그려본다. 결심을 굳히고 상기된 얼굴로 여자에게 다가가는 남자. 그리고 심드렁하기까지 한, 무심한 듯 천장을 바라보는 여자. 남자가 떠나자 여자는 ‘끝나서 기쁘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의 머리를 쓰다듬고 축음기에 레코드판을 건다……. T.S. 엘리엇의 대표작품인 『황무지』 3부 [불의 설교]중 타이피스트와 서기의 정사장면이다. 황무지(황폐해진 세상)에서의 남녀의 성적 타락을 묘사한 이 장면은 엘리엇이 황무지를 발표했을 1922년과 21세기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초자아가 비정상적으로 발전하면 리비도로 떨어진다는 이론처럼 현대인은 겉으로는 교양 있고 유식하며 똑똑해졌으나 내면으로는 과거보다 훨씬 원초적인 것을 탐닉하게 된 것이다.
보랏빛 저녁 장면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를 양성을 가진 티레시아스로 밝힌 화자는 과거와 미래를 현재와 동시적으로 의식할 수 있고, 예언도 하는 자이다.(a historical perspective) 티레시아스는 인간들이 퇴근 시간을 기다리듯 은밀한 극적 사건은 고대한다. 이윽고 나타난 부리부리한 눈매(one bold stare)의 주택중개인의 서기라는 남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권태로운 타이피스트 여자와 ‘자위적 정사’를 나눈다. 자신감에 찬, 그리고 상대방의 반응에는 무관심하며 성급한 청년의 행동은 타이피스트의 무감각한 반응과 대조를 이룬다.
April is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land, mixing
시를 읽어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주워 삼키던 나에게 이 시에 관해 유난히 연상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고독' 내지는 '소외' 이다.
만일 성실하게 일을 하는 황무지 주민들이 자신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존재인 인간이 오히려 땅을 황폐화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황무지를 개간 할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무리 인간이 욕망을 지닌 동물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인류를 파괴하는 게 합리화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유한한 지구의 자원을 가지고 누군가가 지나치게 많이 누린다면, 그만큼 쇠된 사람들에게, 아니 모든 이들에게 돌아갈 몫이 줄어드는 게 아닐까?
이 시가 나에게 고독과 소외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물(이 시에서 물은 봄비를 통해 잠든 뿌리를 뒤흔들고, 히아신스 아가씨의 머리를 아름답게 젖게 만드는 이미지로 나타나 있다)이 메말라서 황무지가 고동색으로 변해서일까?
물론 엘리어트가 현실에서 느끼는 관념을 그대로 뱉어 놓지 않고 사물의 이미지로 잘 바꾸어 표현해서 일 것이다.
그래서 난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이 시를 평가해 보려고 할 때는 이 시의 주제나 관념만을 대상으로 하지 말고, 주제나 관념을 '어떻게' 이미지화 했는가에 기준을 두어야 할 것이라고. 그리고 엘리어트와 같은 위대한 시인의 '시정신'이란 좀 극단적일지 모르겠지만 '이미지 창조'의 정신이였으며, 그것이 이 작품을 다른 장르, 또는 다른 시와 구별지을 수 있는 경계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보았다. (이는 우리나라의 현대시<예를 들어 김수영의 폭포 ,풀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겠는데) 사물이나 자연 자체를 시화한 것이 아니더라도, 관념적인 주제를 사물의 이미지로 표현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애송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5부 4백33행으로 이뤄진 「황무지」는 딱 떨어지게 해석되는 시가 아니다. 1차대전 후의 <시대적 환멸과 허무사상>을 노래한 시라고 하는가 하면 <현대문명의 불모성>을 노래한 시라고 보기도 한다. 심지어는 불교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엘리엇 자신은 이같은 해석을 모두 거부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쓴 시>에 불과하다고 밝히기도 했다고 한다. 어찌됐든, 이같은 다면성을 갖춘 「황무지」는 20세기 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1922년 출판된 후 새로운 시의 대명사로 통해왔다. 다양한 인용과 다채로운 어법등을 통해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혁신적인 기법의 시 세계를 선보였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