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경운기에 실려 있는 땅의 젖에 취하여 경운기 옆에 앉아 경운기를 지켰다. 그러나 경운기는 선생을 지켜 주지 않았다. 추위와 졸음으로부터 선생을 지켜 주지 못했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작품 속 이 문장을 통해 황만근이 추위 속에서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가 동사(凍死)했음을 알 수 있었다. 동사란, 외계의 기온에 의해 체온이 체온조절기구의 한계를 넘어서 저하되어 신체의 생활 현상이 정지되고, 마침내 사망하는 것을 말한다. 적당한 보온장치가 있으면, 사람은 -50~-40℃에도 견딜 수 있지만, 어린이나 노인, 영양이 저하했을 때, 굶거나 피로할 때, 수면 중, 음주를 한 경우 등은 0℃ 전후에서도 동사할 수 있다.
황만근이 실종된 것을 안 마을 사람들과 민 씨는 황만근의 집에 모이게 된다. 그러나 진정으로 걱정하는 사람은 민씨뿐, 다른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황만근은 어렸을 때부터 말투가 어눌하고 행동이 우스꽝스러워서 마을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마을의 궃은일을 도맡아 하는 성실하고 바른 인물이다.
국어 방과후 시간을 통해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라는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황만근이 없어졌다.’는 극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성석제의 단편소설이며, 성실하고 너무나 순박한 나머지 많은 사람에게 반푼이 취급을 당하는 시골 농부 황만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그를 뱃속에 품고 있을 때 전쟁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열 달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왔다. 그 탓인지 남들과 확연히 차이나는 말투와 행동을 갖게 되었고, 양아들과 민 씨를 제외한 동네 사람들로부터 바보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책임감이 강하고 자신이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해냈던 그는 그 마을에서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들을 도맡아 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작년 이맘때쯤에 수능 기출 공부를 하다가 접하게 된 짧은 지문이지만 마음속에 계속 생각나는 소설이었다. 그 때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전문을 읽고 싶었지만 미뤄두었다. 이번 100선에 이 책이 선정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 기회에 책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와 만나게 되었다.
평소 성석제 작가의 소설을 관심 있게 보았는데, 이 책은 총 7개의 성석제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있다. 작가 성석제는 해학과 풍자, 과장과 익살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국면을 그려내는 작가이다. 그는 거짓과 참, 상상과 실제, 농담과 진담,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계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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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에는 도무지 익숙하지가 않다. 더욱이 성석제의 소설은 호흡이 너무 빨라 더욱 읽기가 쉽지 않았다. 이럴 때는 속독으로 한번 읽고 정신을 차린 후 다시 읽어야 한다. 부록에 있던 정호웅의 해설 ‘새로운 문제 미학’을 읽고 성석제 소설이 비로소 이해가 될 정도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성석제의 글에 적응하지 못했던 이유가 어린 시절 마음을 빼앗겼던 대하소설인 대지, 토지, 태백산맥 등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들 소설이 갖고 있는 권선징악의 결과론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명료성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은 아닐까 나름대로 짐작해 본다. 성석제의 소설은 삶 속에서 툭 던져진 일상이 주제가 되고 방향성도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나는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며 독서의 편식이 얼마나 몽매한 독서태도인지를 반성하게 되었고,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변화가 생겼다.
다소 독특하게 느껴지는 제목은 니체의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그야말로 황만근의 생애를 낱낱이 고하고 있는 책이다. 차이가 있다면, 차라투스투라의 금언이 지혜를 담고 있어 별도의 해석을 필요로 하는 반면 황만근은 “반푼이”로 태어나 자신의 지혜를 말 안에 온전히 담지 못했으므로 달리 해석을 덧붙여야 했다는 점이다. 팔삭둥이로 태어나 마을의 험한 일을 도맡을 뿐 아니라, 집에서까지 편모 봉양에 외아들 비위를 맞추느라 나이보다 열댓 살은 늙어버리고도 자의든 타의든 대가를 바랄 수 없었던 삶. 성석제는 황만근을 통해 현대 사회에 어떤 물결을 보내고자 했을까.
주인공 황만근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한 마디로 우직함이다.
항상 어쩌다보니 똑똑함이 가장 좋고, 필요한 덕목인지 알고 살아왔지만 이 소설을 보며 우직함을 가지고 밀어 붙이는 모습을 통해 앞으로의 나에게 우직함이라는 덕목이 절실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분명히 목표를 못 정할 때도 있었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을 때도 어리석고 고지식하게 그 일을 진행하려 하는 우직함이 부족했었다.
◉마음 열기
황만근이라는 사람은 약간 모자라다. 제목처럼 무엇인가 훌륭한 업적을 내보낸 사람도 아니며, 특출난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이사람 (황만근)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이해타산적인지, 그리고 악독한지를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황만근의 모자람 속에 오히려 마을사람들의 잔머리, 이해타산적인 사고방식이 날카로운지 알 수 있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 제목만 보면 황만근이라는 사람은 대체로 위대한 사람 같으나, 전혀 위대한 사람이 아니다. 마치 포레스토 검프처럼 우직하고 모자라기까지 한 인물이다.
◉내용 알기
황만근이라는 사람은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우직함 때문에 오히려 마을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기도 한다. 어수룩함 때문에 오히려 마을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1990년대 말기에 IMF구제금융을 받은 한국사회(농촌사회)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우리말과 사투리를 정말로 잘 사용하는 작가 성석제가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말투, 행동 같은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에게서 따온 듯한 리얼리티, 사실성이라는 작가의 장점이 잘 나타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대사, 행동 같은 것들이 소설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글자로 옮겨 놓은 것처럼 사실적이며 또 시각적으로도 선명하다. 황만근, 이라는 인물과 그를 이용하는 주위 인물들의 이기적인 감정이 아주 여실히 드러나는 내용이 이 작품의 중심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등장인물과 캐릭터성을 떠나 내용 면으로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흔히 시골이나 섬 같은 곳에는 인심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기 때문에 살기 좋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작은 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범죄나 이기적인 상황이 곧잘 발생하기도 한다.
성석제의 단편 소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는 황만근의 과거부터 그의 실종, 그리고 죽음까지 전부 황만근에 관한 이야기로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그의 일생을 총정리하고 평가하는 묘비명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그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민씨가 쓴 황만근의 묘비문을 보면 뚜렷이 알 수 있다. 그의 생애를 온전하게 되살리고 그의 생애의 의미를 다지는데 작가가 선택한 이 묘비명 형식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형식이 할 수 있다.
실종된 황만근의 소재를 찾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서 논의를 하는 것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만 할 뿐 선뜻 찾아나서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메마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첫장면부터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변한 1970년대 농촌의 현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야기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되는 황만근가’ 를 통해 황만근의 출생과 성장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되고, 이 황만근가의 가사를 일일이 설명해주면서 체계적으로 황만근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