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계축일기』는 선조 만년에서 시작하여 계축옥사를 기점으로 일어났던 궁중의 여러 사건들을 인조반정 이후에 정리한 것으로, 당시의 전쟁과 당쟁으로 일어났던 사화, 옥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왕권다툼의 희생자인 광해군과 영창대군, 인고의 세월을 보낸 인목대비, 죄없이 죽어갔던 수많은 궁인들...
서론> 궁중문학은 “봉건시대 최고의 통치자가 거처하던 궁궐과 그의 친족이 거처하던 궁가, 궁방에서 일어난 일들을 소재로 하거나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이 투영된 작품을 말한다. <계축일기>, <인현왕후전>, <한중록>에는 조선의 정치, 경제 등 시대정신과 궁중문화가 자연스럽게 투영되었다. 왕조국가에서 왕실문화는 그 시대의 고급문화이다. 통치자는 하늘이 선택한 사람이기에 이승에서 삶의 공간인 궁궐과, 저승의 영원한 안식처인 왕릉은 당대 최고의 장인에 의해 건축되어 왕조의 규모와 건축 수준을 가늠케 하는 기준이 된다. (하략)
계축일기는 닫혀있던 서궁이 열리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악인인 광해군의 철저한 몰락을 예고하고 있다. 문이 열리는 것은 그 안에 있던 인목대비와 정명공주, 나인들의 비참하고 피폐했던 삶을 보여 줌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것을 암시한다. 계축일기는 철저히 인목대비 측의 입장에서 씌어졌다. 그래서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못 할 짓을 한 광해군이 절대 악인으로서 묘사되고 작품 전체에서 권선징악의 기대가 흐르고 있다.
어린 인목왕후가 잉태한 것은 이미 왕세자가 된 광해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상황을 본다면 절대 인목왕후가 생산한 자식은 광해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도주하기 바빴던 선조와는 달리 광해군은 최전선에서 백성들, 군사들과 더불어 나라를 지켜내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갖추고 그만큼 신료들과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계축일기는 인목대비의 폐비 사건과 영창대군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수필이다. 3대 궁중문학으로서 사실적인 기록을 하기도 하였지만, 험담과 하소연에 대한 내용으로 작가의 관점이 개입되어 있다. 계축일기는 작가 미상으로 현재 인목대비 자작설과 인목대비 측근의 나인이 썼다는 설, 영창대군의 누이인 정명공주가 창작에 관여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수업시간에는 인목대비가 작자일 것이라 예상하고 배웠는데, 나 역시 책을 읽으면서 인목대비 자작설에 더 믿음이 갔다. 더불어 계축일기를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3대 궁중문학 중 하나인 계축일기를 읽어보았다.
계축일기는 인목대비 폐비 사건에 대한 궁중의 비사를 기록한 작품이다.
죽은 선조의 계비이며 지존의 위치에 있으면서 비극적인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인목대비의 굴곡지고 인생과 인목대비를 박해하는 광해군, 그리고 광해군을 부도덕한 임금이 되도록 부추긴 대북파의 권신들, 갖은 박해와 서궁의 내인들을 등장시킴으로서 보여주는 당시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바로 계축일기이다.
계축일기는 인목대비를 모시던 서궁의 나인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영창대군의 누이인 정명공주가 소설에 관여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계축일기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선조 후반부터 광해군을 지나 인조반정까지가 되겠다.
계축일기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인 인목대비를 살펴보자면 조선의 14왕인 선조의 계비로 광해군 즉위 후 아들 영창대군과 아버지인 김제남이 죽임을 당하고 폐서인 되지만 인조반정을 통해 다시 복권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다.
“한중록”, “인현왕후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궁중문학의 하나로 손꼽히는 “계축일기”는 광해군이 어린 이복동생인 영창 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 대비를 서궁에 가둔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실각할 때까지의 과정을 인목대비 측 시각으로 기록된 작자 미상의 작품이다. 인조반정은 1623년 4월 11일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반정의 주요명분은 1.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인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고 2.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패륜을 저질렀고 3. 친형인 임해군을 죽였고 4. 선왕의 애첩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것을 명분삼아 반정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반정을 통하여 조선 후기시대는 오히려 역사의 퇴보를 자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