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 보여지는 조선 선비들의 과거공부의 실상, 불편한 진실을 파헤침으로서 이 시대의 우리교육을 조망하였다. 성균관 기피, 사교육과 예상문제집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과거공부의 키워드는 지금의 교육현실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I. 서론
교육 강국! 우리나라는 아주 오래전부터 교육의 힘을 믿어온 나라다. 온 국민의 대다수가 대학에 가는 것이 당연한 나라! 사교육의 천국! 입시지옥으로 불릴 만큼 치열한 입시경쟁은 여러 가지 사회적 부작용을 낳아온 것도 사실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시 위주의 공교육 개혁을 부르짖어온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입시위주의 교육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또한 과거공부가 무조건 부정적인 역할만 한 것이 아니다. 한국인들의 DNA에 각인된 과거공부의 학습 유전자들은 지금도 한국이라는 이 작은 나라를 세계의 교육학자들조차 관심을 갖게 하는 교육성과를 내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이원재의 책 <과거공부를 알아야 우리 교육이 보인다>는 과거공부에서부터 기인한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과거공부의 긍정적 측면을 다시 주목하게 하는 책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과거공부를 알아야 우리 교육이 보인다>를 중심으로 과거공부가 우리나라의 현대교육에 미치는 긍정적인 역할에 대해 알아보고 이 글을 읽고 난 필자의 소감과 단상을 밝히고자 한다.
이 책을 통해 사교육이 과거 조선 시대에도 만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새로운 깨달음은 굉장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교수님께서도 이전에 언급하신 적 있지만, 흔히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선비들은 굉장히 고고하게 경전이나 삼강오륜만 읽으며 공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들도 ‘초집’과 같은 벼락치기용 교재를 만들어 공부했다는 것이다. 조금은 믿기지 않기도, 한편으론 조금 실망스럽기까지 한 것 같다. 그 먼 옛날부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구나 싶었다. 이런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라면 진짜 우리는 현재 교육계의 많은 병폐를 없애고 더 나은 교육을 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한 게 아닐까라는 염려마저 들었다.
왜 그렇게도 과거 시험에 극성이었던 이유를 읽어보니 선조들의 행동을 조금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조선 시대에 과거 시험에 목을 맸던 이유는 생존과 가문유지를 위해서였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찹찹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오늘날 도제식 교육은 식민사관 때문이라 생각했고 끊겨진 옛 훌륭한 교육관을 복원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서적을 읽을수록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자아수련을 해왔다 생각하였고 마음 속 굳건히 자리잡았던 어진선비의 상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어 큰 충격이었다. 초집과 빈양한 성균관이라니... 사람다움을 배우는 교육이 그때도 없었다니 절망적일 수 밖에 없었다.
미혼인 나에게 결혼과 육아에 대해 물으면 결혼은 어떻게든 한다 해도 애는 낳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내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다. 꿈을 망가트리는 교육. 아예 꿈을 심어주지 못하는 교육환경에서 내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다. 나는 평소 프랑스 문화와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교육은 유럽, 특히 창의력을 키워주는 북유럽의 교육이다. 나는 아이에게 직접 만지게 하고 느끼게 하고 몸으로 체험하는 교육을 하고 싶은데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
【죽음도 막지 못한 과거 합격 열망】
(영의정 등이 아뢰기를) 과거 날짜를 점점 뒤로 물리면 농사 때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방의 가난한 유생들이 양식을 싸가지고 오느라 분주하게 될 것이고, 이 때문에 농사 때를 잃어 아사(餓死)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중종실록』권99 중종 37년 12월 을유)
그들에게 과거시험은 한해 농사와 남은 가족들의 목숨과도 맞바꿀 수가 없는 그 무엇이었던 것일까?
“전하께서는 이 많은 신하와 백성을 내버려 두고 굳이 필부의 행동을 하시려 하십니까?……의주의 토병(土兵)만도 거의 천명이나 됩니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진 상태입니다만 만일 과거 시험으로써 이들을 소집한다면 그들을 모으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선조실록』 권27 선조24년 6월 임자)
실제 왜군들에 의해 함경도 방어선이 무너져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운 상태에서 그들은 과거시험의 목적이 전쟁터에 내보낼 사람을 선발하는 것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전쟁도 불리한 상황이었다. 합격은 전쟁에서의 죽음과 직결된다는 것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과거시험 합격에 그토록 목숨까지 내 걸 수 있었던 그 이유는 무엇이었던 것일까?
또 과거시험 합격자 중 76세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사람들이 더 있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 공무원 시험에도 고령의 합격자들이 있다. 하지만 해방 직후 그 당시의 평균수명이 40세 초반에 불과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들은 왜 끝까지 과거시험에서 손을 놓지 못하였던 것일까?
【병마도 막지 못한 수험생의 의지】
폐암 4기 판정을 받고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입원치료 중이던 김동희(18)군은 201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기 위해 잠시 퇴원했다. 병마도 수험생 김군의 투혼을 막지 못한 것이다. 김군은 경기도의 한 고교에 마련된 특별고사실에서 시험을 무사히 치렀다. 유잉육종이라는 희귀한 근육암에 걸린 뒤 잦은 전신마취로 기억력은 감퇴했고 항암치료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지만 화상 수업을 들으며 학업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