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장준하 전집' 제1권 『돌베개』. 1962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고 1973년 민주통일당 최고위원에 임명되었으나,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ㆍ복역ㆍ석박을 거쳐 1975년 의문사한 저자의 전집이다.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지만, 의문사의 그늘에 가려 참모습이 알려지지...
돌베개를 보기 전까지는 장준하는 학도병출신으로, 임시정부 대한광복군에서 활동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장준하는 학도병에서 탈출하여 임시정부에 오기까지 얼마나 큰 역경을 겪었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자신이 살아온 세월보다 더 긴 세월을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이 대다수인 임시정부에서 한 발언들, 그리고 행동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책의 절반을 차지하는 학도병탈출로부터 임시정부까지의 역경은 책의 분량만큼이나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아니었다.
책의 부제가 항일대장정이라 단순하게 항일운동을 한 독립운동가라고만 생각했지만, 신문사를 창간하고 국회의원에도 당선되고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반대운동을 주도하여 의문의 사고로 삶을 마감한 안타까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장준하의 자서전적 소설로 장준하의 숨막히는 탈출과 파란만장한 인생을 잘 보여준다. 장준하가 일군을 탈출하여 중국중 앙군에 들어갔을 당시 일본 군복을 벗고 불로하 강에서 목욕을 하고 중국 군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애국가를 불렀다. 그러나 여기서도 이들은 일제 식민지에 내선일체 몰입교육을 받던 시기여서 애국가를 4절까지 배우지 못해 완창하지 못했다는 뒷이야기가 기껏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했는데 다시 새롭게 들어가게 된 곳이 중국중앙군이라는 씁쓸한 이야기와 어울려 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또, 장준하의 오랜 염원으로 똘똘 뭉친 서울 진공 작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광복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나라의 들어와서......<중 략>
이 책의 저자인 장준하 독립운동가 선생님은 내가 알기로는 김구선생님 다음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라고 생각이 든다. 내가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근대, 현대사를 배울 때, 역사 선생님께서 언급과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책을 읽게 된 계기(호기심)가 된 것 인지도 모르겠다. 돌베개 라는 제목의 책처럼 나는 장준하선생님의 바르고 고운 정신, 실천하고 노력하는 지식, 불의를 보지 않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고 고난의 상징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점이 있다면, 독립 운동을 위한 그의 노력과 의지를 볼 수 있었다. 또, 국내 뿐 만 아니라 국외에서 나라를 위해서 저항을 한 젊은 청춘에 대한 현대사라고도 보인다. 이 책을 보자면, 약간은 소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겪었던 스토리들을 긴장감 있게 묘사를 했고, 또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스릴감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하자면, 생동감이 넘치는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또, 작가 자신의 필체를 느껴 볼 수 있는 책이 아닌가도 싶었다
처음 이 책을 접한 이유는 돌베개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서였다. 암울한 일제시대, 즉 우리 민족이 고통 받은 비참한 시대를 나타낸 것으로 일제시대 때의 그 참혹함을 엿볼 수 있다.
돌베개는 그가 죽기 4년 전 펴낸 자서전적 소설로 1944년 7월 7일부터 1945년까지 2년간의 파란만장한 나날들을 그린 것이다. 그는 학도병이로서 중국 서주에 있는 일본 군영에 있다가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과 함께 탈영을 시도한다. 그들은 당시 중경에 위치한 임시정부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안전과 나라에 대한 애국심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마침내 그 당시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행을 결심한 것이다. 탈영 직전, 그는 고국의 집에 편지를 보냈다. 편지 도중에는 ´앞으로 베어야할 야곱의 돌베개는 나를 더욱 유쾌하게 해 줄 것이다´라고 해 그의 굳은 결의를 엿볼 수 있었다. 탈영 도중 굶주리고, 목이 말라 썩은 물을 먹기도 하는 등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운 좋게도 그는 중국의 진영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 곳에서 한 때 일본 진영의 포로 교환 요구에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한 사령관의 배려로 그들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중국 진영에서도 오래 머물지는 못하였다. 중국의 팔로군의 기습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중국 진여에서 나와 다시 중경으로 향한다. 중경을 가던 도중 광복군에 들어간 그는 광복군에 기대기는커녕 오히려 취사를 책임지고, ´등불´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등 광복군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여 광복군을 이끌어가게 된다.
비로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야, 나름대로 전체적인 글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짐을 알게 되었는데 하나는 해방 전, 고(古) 장 준 하(이하: 장준하)씨가 학도병을 탈출하기까지의 모습을 그린 내용과, 다른 하나는 해방 이후 임시정부의 김 구 주석 밑에서 그를 도우면서 바라본 그 당시의 사회상을 담은 내용이다.
돌베개는 그가 죽기 4년 전 펴낸 자서전적 소설로 1944년 7월 7일부터 1945년까지 2년의 파란만장한 나날들을 그린 것이다. 그는 학도병이로서 중국 서주에 있는 일본 군영에 있다가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과 함께 탈영을 시도한다. 그들은 당시 중경에 위치한 임시정부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안전과 나라에 대한 애국심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마침내 그 당시 임시정부가 있던 중경행을 결심한 것이다. 탈영 직전, 그는 고국의 집에 편지를 보냈다. 편지 도중에는 `앞으로 베어야할 야곱의 돌베개는 나를 더욱 유쾌하게 해 줄 것이다`라고 해 그의 굳은 결의를 엿볼 수 있었다.
탈영 도중 굶주리고, 목이 말라 썩은 물을 먹기도 하는 등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운 좋게도 그는 중국의 진영 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 곳에서 한 때 일본 진영의 포로 교환 요구에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한 사령관의 배려로 그들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중국 진영에서도 오래 머물지는 못하였따. 중국의 <팔로군>의 기습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중국 진여에서 나와 다시 중경으로 향한다. 중경을 가던 도중 광복군에 들어간 그는 광복군에 기대기는커녕 오히려 취사를 책임지고, `등불`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등 광복군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여 광복군을 이끌어가게 된다.
처음에 독후감 과제로 <돌베개>라는 책을 받았을 때는 그냥 단순히 `지루한 역사소설이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점에 가서 <돌베개>라는 책을 보는 순간 장준하라는 이름 석자가 내 눈에 드렁왔다. 장준하... 내가 이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작년 겨울에 TV의 어느 한 다큐멘터리에서였다. 그 다큐멘터리는 장준하 선생의 등산 도중 의문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도했었다. 그 때 장준하라는 이름을 들은 이후로 그 분의 업적에 대해 궁금증을 가졌었지만 이내 잊었었다. 그러나 이번에 독후감 과제로 <돌베개>를 받으면서 업적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던 것이다.
그는 광복군에 기대기는커녕 오히려 취사를 책임지고, `등불`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등 광복군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여 광복군을 이끌어가게 된다. 광복군 졸업식이 있는 날. 그는 연예회를 열어 많은 공연들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다시 중경으로 향한다.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결국 1945년 1월 31일, 그는 중경의 임시정부에 도차갷T다. 그곳에서 그는 꿈에도 그리던 임시정부의 요인들을 만났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그를 만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여러 당이 결합하여 결성한 임시정부인지라 내부 분열이 심각했던 것이다. 부패한 임시정부에 실망을 느끼던 장준하와 r를 따라 임시정부로 온 많은 젊은이들은 결국 이범석 장군을 만나게 되고 그의 휘하에 들어가 훈련을 받고 미군 OSS의 대원이 되어 미군과 함께 국내 침투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그 해 8월, 광복이 되고 만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11월 23일 그는 김구를 중심으로한 임시정부 요원 중 한명으로 고국에 발을 내딛었다. 그는 고국에서 김구 선생을 보좌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돌베개>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먼저 「돌베개」에 대한 독후감을 적기 전에, 지은이에 대해 알아본 후에 책을 접하는 것이 이해에 조금 더 도움을 줄 것 같아 장준하 기념 사업회 사이트의 10여분 분량의 동영상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장준하 선생님에 대해 개략적으로 알아보았다.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에서 태어나 선천 신성중학, 일본 도쿄 신학교를 다녔다.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에 입대, 중국에 끌려갔으나 그해 7월 탈출, 중국전에 가담하였다. 1945년 1월 광복군에 편입, 광복군 대위에 임관되었으며 「등불」, 「제단」 등을 간행하였다.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 사람으로서 입국, 김구 주석 비서, 비상국민회의 및 서기 및 민주의원 비서 등을 거쳐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교무처장, 대한민국 정부 서기관, 국민사상연구원 사무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3년 「사상계」를 발행, 자유·민주·반독재 투쟁에 헌신하였으며, 1962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1967년 야당통합을 추진하여 신민당에 입당하였으며, 그해 4월 국가원수모독죄로 투옥되었고, 6월, 옥중출마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 최고위원에 피임되었다.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되었으나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사고사하였다.
먼저 이 책을 빌리기 위해 수시로 도서관을 들락날락거렸지만 항상 대출 중이었고 반납날짜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제 위치에 꽂혀있는 책은 없었다.
그는 탈출 후 임천으로 가는 도중에 중국의 중앙군과 공산군 사이의 동족상잔을 보았다. 함께 힘을 모아도 모자란 그런 시기에 같은 민족끼리의 분란을 겪고 있는 중군인들을 그 당시의 그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6.25 전쟁이 일어나 이 같은 상황을 그도 겪게 된다. 그때의 마음이 수십 년이 지난 후 글을 쓰고 있는 그에게도 그대로 남아있었는지 글 한 구절마다 그의 통탄하는 심정이 드러나 있었다.
그들은 여러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중국의 군관학교 임천분교 안에 있는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도착하였다. 오랜 고생 끝에 만난 같은 핏줄과 모국어가 얼마나 반갑고 감격스러웠을까. 생사를 넘나드는 도피 끝에 도착한 곳이니 쉴 만도 하였으나, 그의 애국심은 그가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와 동지들은 그곳에서 동포들의 발전을 위해 강좌를 열고, 그것을 모아 '등불'이라는 잡지도 만들었다. 3개월이 흘러 졸업을 할 때에는 반일사상의 연극도 여러 곳에서 공연하였다. 삼시 세끼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조국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그 많은 일들을 해낸 그들의 애국심과, 그들을 나태해지지 않게 이끌고 나간 장준하 선생의 리더쉽이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