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를 우리말로 옮긴 책. 18세기 말부터 급성장한 영국의 자본주의는 극심한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과도한... 하는 공리주의를 제창하였다.
밀은 <공리주의>에서 프로타고라스와 플라톤의 논쟁으로부터 비롯된 철학의 오랜 물음인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
세상은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필자는 깨달았다. 대도시 한가운데 한 마리 늑대처럼 외로이 살아가면서.
고등학교 때까지, 필자는 세상은 ‘정의롭다’고 생각했었다.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인간 공동체라고 생각했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감탄스러운 도덕법칙’과 이성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2년 동안 겪은 사회는 약육강식의 논리로 돌아가는 정글이었다. 얼마 전, 보복운전으로 고소한 건에 대해 합의를 봤다. 보복운전은 법률 용어로는 ‘특수협박’과 ‘특수상해’에 해당하는데, 자동차는 흉기로 사용될 수 있기에 칼을 들고 위협을 한 것과 상동한, 무거운 죄질이 적용된다. 가장 이상적인 결말은, 그쪽이 먼저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진심을 담아서 사과하고, 필자도 적절한 피해보상을 받고 서로 웃으며 사건을 종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가해자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변명하기에 바빴다. 경찰 조사에 들어가서도 오히려 필자를 난폭운전으로 맞고소하려고 했다. 합의 과정도 어려움이 많았다. 필자는 처음에 좋게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이 말한 약속 시각을 안 지키는 것은 물론이요, 이미 합의가 끝난 피해보상금을 갑자기 깎으려 들었다. 특히, 상당히 뻔한 레퍼토리인 ‘제가 사정이 안 좋아서요’라고 읍소하며 불과 약속 몇 시간 전에 연락하는 태도는 상당히 불쾌하게 다가왔다. 결국, ‘그러면 처벌받으시고, 민사는 별도로 진행하겠다’라고 강하게 통보한 이후에야 상대는 투덜대며 합의를 마쳤다. 물론 필자도 순수하게 도덕적이지 못했다. 협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모든 수를 다 썼다. 가해자의 태도에 감정 상했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특수협박 합의금이 적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는 개인의 행복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행복을 고려한 윤리적 틀을 제시하는 작품입니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라는 유명한 명제는 단순한 쾌락 추구를 넘어 고상하고 지적인 삶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먼저 쾌락의 질적 차이이다. 돼지와 소크라테스의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공리주의는 쾌락의 양보다는 질을 중요시합니다. 밀은 고상하고 지적인 쾌락은 낮고 감각적인 쾌락보다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하며, 단순한 쾌락에 취하는 것보다 진리와 지식을 추구하는 삶의 의미를 강조합니다.
밀의 공리주의에 대해 읽으면서, 그의 이론이 벤담의 쾌락 계산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벤담은 쾌락을 계량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쾌락 계산법을 통해 행복을 양적으로 가늠하는 양적 쾌락주의를 제창했다. 이는 주로 물질적 욕구를 중시하고 개인 중심적인 속성을 강조하는 공리주의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밀은 인간의 발전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며, 이기심을 억제해야 할 당위성을 강조하는 질적 쾌락주의를 제시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끊임없이 사유하고, 고민하고, 논쟁해왔다. 우리는 오랫동안 여러 사회 현상과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왔으며 그중 하나는 윤리에 대한 것이다. 옳고 그름은 무엇인가? 이를 이분적으로 나눌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존재하나? 아직 이 질문에 대한 절대적인 하나의 대답은 없다.
<중 략>
이상론에 기대 양심에만 호소할 수는 없다. 현대 사회의 감성에 좀 더 부합하는 말은 자신이 불의를 감수해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움을 받아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고, 그때 같은 개인은 남들의 자유를 희생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대성에 기대어 설명한다면 불확실하고 위태롭지만 아름다운 현대 사회의 개인들이 서로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잘못 해석된 부분이나 실천적 관계에 있는 반대이론들의 오류를 증명해야하는 공리주의는 다른 이론들과 구별되는 특징을 가진다. 공리주의가 증명해야하는 반대이론의 예로 선천적인 도덕주의자 칸트가 주장한 것이 있다. “네 행위의 격률이 모든 이성적 존재에 의해 법칙으로 채택되도록 행동하라.” 칸트의 이런 이론을 공리주의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칸트가 위의 격률로부터 도덕성의 의무를 연역하고자 한 시도는 실패하였다.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비도덕적인 행위 법칙을 채택한다는 모순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올바른 사유를 위해서는 우리의 도덕적 능력이 다만 도덕 판단의 일반 원칙을 제공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도덕적 능력은 이성의 조각이지 감각적 능력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도덕성에 대하여 추상적인 설명이나 이론을 기대할 수 있을지라도 구체적으로 도덕성을 인지할 수는 없다.
직각론적 윤리학파와 귀납론적 윤리학파는 도덕 법칙의 일반 법칙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런데 이 두 학파는 도덕법칙을 증명하는 방식과 도덕법칙의 권위를 도출해 내는 과정에서 서로 차이점을 보인다. 직각론적 윤리학파는 도덕원리란 용어의 이미를 이해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동의 자체가 필요 없는, 선천적으로 자명한 것이라 주장한다. 귀납론적 윤리학파는 옳고 그름의 구별이란 참, 거짓의 판별처럼 관찰과 경험의 문제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 도덕성은 원리로부터 산출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도덕과학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역설한다. 하지만 두 학파 모두 도덕과학의 전제가 될 선천적인 원리들을 정리, 규약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 이 학파들에게 지금 선행되어야 할 시급한 문제는 위에 언급한 각종 선천적 원리들을 유일한 제 1원리 또는 의무의 공통 근거로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도덕성의 근간을 아우르는 하나의 토대(기초 원리나 법칙)를 갖추고 이들 간의 우선순위를 정해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중의 지지를 얻기 힘들다.
‘공리주의’는 영국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이 쓴 책으로, 벤담의 공리주의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집필했다. 저자는 개인의 행복보다 사 회 전체의 행복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내용 때문에 많은 논 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나 당시에는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9년 출간된 이후 100년 동안 꾸준히 읽힌 고전 중의 고전이다.
밀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호하게 말한다.
Ι. 제2장
나는 공리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제2장 첫 부분에 다수의 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쾌락’의 관점으로 봐서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쾌락은 분명 인간의 발전과 성장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공리주의를 싫어하는가? 그 이유는 공리주의가 “최대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최대 다수의 행복, 얼마나 좋은 말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윤을 극도로 추구하기 때문에 못사는 사람과 잘사는 사람이 나뉠 수밖에 없다. 당연한 구조에서 최대 다수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 참 일리가 있는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공리주의 이론대로 한다면, 최대 다수의 행복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 된다.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인권을 누려야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게 가당한 일인가 싶다.
밀은 고급쾌락, 저급쾌락을 나누고, 고급 쾌락을 느끼는 능력은 아주 연약한 식물과 같아 금방 시들 수 있다고 말하며, 사람들이 고급 쾌락을 느낄 수 있도록 사회가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밀의 주장에 따르면, 저급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고급 쾌락을 느끼는 것을 상실하였거나 그러한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에 내가 향유를 하는 쾌락이 저급이라고 평가를 받는다면 고급 쾌락을 향유하는 사람과 비교하여서 덜 행복한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적인 감각이 뛰어난 지성인은 당연하게 고급 쾌락을 추구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밀의 주장은 엘리트주의적이라고 생각하며, 고급 쾌락과 저급 쾌락을 나누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주관적이라고 본다. 그래서 내가 향유하는 쾌락이 저급이라고 평가를 받는다고 하여도 나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립적인 윤리적 위치로서의 공리주의는 18세기에야 생겨났지만, 근본적인 공리주의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생각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자유주의 전통에 역사적 뿌리를 둔 도덕성 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 이론이다. 공리주의의 목적은 결과의 계산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도덕이론으로서, 그러나 공리주의는 하나의 일관성 있는 이론이 아니라 수년간 발전해 온 관련 이론들의 집합체라는 사실 때문에 서로 다른 이유와 다른 대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리주의의 많은 비판들이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이론으로서의 공리주의의 몇 가지 문제점들을 설명하고 이러한 문제들이 극복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나는 밀의 공리주의 입장과 다르게 개인의 이익과 입장에 따라 도덕성과 덕의 개념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 도덕적인지는 사회마다 각기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아무리 보편적 기준이 있더라도 그 세부사항을 따졌을 때, 개인은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자신의 행복을 먼저 고려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도덕성과 개념은 늘 변할 수 있으며 보편적 질적 기준으로 도덕성과 위계질서를 언급하는 정치계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공리주의는 공정하고 개인의 이익에 좌우되지 않는다. 과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트롤리 전차문제만 따지고 봤을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는 사람이 레일에 있을 경우 이를 피하려고 한다. 따라서 이는 개인의 이익과 더불어 주변 가까운 사람에 대한 애착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