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 해의 마지막 날, 낡은 반코트를 입은 여인이 어린 두 아들과 우동집에 들어와 머뭇머뭇 "우동 한 그릇만 시켜도 될까요?"라고 묻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우동 한 그릇'. 이 이야기는 1989년 일본에서 한 국회의원이 낭독해 '일본 국회를 울린 책'으로 화제가 됐고, 이후 일본 전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가난을...
구리 료헤이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마음 한편이 묘해진다. 그중에서도 우동 한 그릇은 읽는 이를 무심코 울컥하게 만든다고 들었다. 여러 해 전에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낡은 반코트를 입은 여인이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우동집을 찾는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그 여인이 움츠린 몸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고, 마치 허락을 구하듯 낮은 목소리로 질문하는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한 번 읽어도 마음이 울렁거리는데, 직접 그 책 전체를 다 읽었을 때 느낀 감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먹는 문제에 대한 소재는 언제나 감정선을 건드린다. 배고픔이나 음식 앞에서 인간은 아주 솔직한 모습을 보이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여인이 가진 고민이 너무도 직접적으로 전해져서 숨이 막혔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사람들은 분주하게 길을 지나가고, 가게 안에서도 손님들이 따뜻한 우동을 먹으며 한해를 정리하는 분위기였다. 그 여인은 아이 둘을 데리고 마치 무거운 결정이라도 내린 듯 우동집 문을 열었다. 가게 주인은 처음엔 특별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인이 조심스레 묻는 말에 뭔가 낌새를 차린 것 같다. “우동 한 그릇만 시켜도 괜찮을까요.”라는 말은 마치 목에 걸린 돌덩이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 한마디에 담긴 자존심과 간절함이 뼛속까지 전해졌다. 여인의 재정 상황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도 조용히 서 있었고, 그 모습은 왠지 슬펐다.
가게 주인은 한 그릇을 주문한 여인과 그 아이들에게 서운한 내색 없이 우동을 내주었다. 국물의 온기가 피어오르는 그릇 하나. 그걸 세 사람이 나눠 먹는 풍경이 어딘가 애잔하게 느껴졌다. 괜히 눈이 시큰거렸다. 그러나 그 가게 주인이 추가로 무언가를 더해주거나 혹은 값을 깎아주려는 식의 과도한 친절을 베풀진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지키면서 그 가족이 편히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 배려가 어쩌면 더 큰 감동이었다. 남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대했다. 한편으론, 그걸 지켜보는 가게 주인이나 옆자리 손님들 마음속에도 미묘한 파동이 일어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각박하다. 살기 팍팍하다. 그런 말을 한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사람과 사람 간의 정이 없다고 느껴질 때 이런 말을 주로 썼다. 그러고 보면 잘 산다는 기준은 과연 돈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생 때 한동안 속칭 <노숙자 지원 봉사>라는 걸 한 적이 있다. 그 곳에 가서 하는 일은 간단하다. 밤 11시쯤 봉사단 사무실로 간다. 오늘 밤 지원을 갈 지하철 역 리스트를 뽑는다. 타 기관으로부터 후원받은 라면과 물 등의 개수가 넉넉한지 체크하고 따뜻하게 갓 지어진 흰 밥이 완성되면 흰 스티로폼 박스에 위생 비닐을 깔고 밥을 옮겨 담는다. 온수기 여러 개에 물을 가득 채워 넣고 남자들은 스타렉스에 물품들을 싣는다. 여자들은 핫 팩과 옷가지들, 담요들을 챙겨 차에 싣는다.
일본이 이런 힐링 같은 내용의 소설을 더 잘 쓴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동 한 그릇은 우동 가게에서 벌어지는 사연을 그린 소설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자녀를 데리고 우동을 주문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임에도 오직 1인분만 주문을 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게 주인은 우동을 더 많이 삶아서 제공을 했다. 다시 오고 또 주인은 우동을 충분히 더 많이 삶아서 주고 반복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녀는 안 오게 된다. 가장이 사망하고 나서 힘겹게 산다는 것만 알려졌다. 그런데 나중에 그 우동을 먹은 자녀가 우동집을 찾아온다.
우동 가게 주인이 너무 인간미 넘치고 좋았다. 심지어 물가가 오른 상황에서도 예전 그 모자가 생각이 나서 계속 예전 물가로 음식을 주문할 수 있도록 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부는 가을 풍경은 이제 계절의 마지막인 겨율을 향해 가고 있다. 주변에서 ‘에취’ 하는 소리를 하며 감기에 걸린 사람들이 나타나고 그러던 중 도서관에서 읽었던 ‘우동 한 그릇’ 이란 책을 읽었던 생각이 난다.
작가 구리 료헤이의 단편 소설로 이 이야기를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섣달 그믐날 밤에 늦게까지 운영하고 있는 ‘북해정’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 부부는 늦은 시간에 방문한 세 모자 손님에게서 우동 한 그릇 주문을 받게되어 대접한다.
그 다음 해에도 찾아와 우동 한 그릇을 주문하자 세 모자를 안쓰러웠는지 사장의 부인은..
<중 략>
해마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우동 집으로서는 일 년 중 가장 바쁠 땐데, 이날 북해정도 바빴다. 마지막 손님이 가게를 막 나갔을 때, 슬슬 문 앞의 옥호 막을 거둘까 하고 있던 참에, 두 명의 아이를 데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는데 6세와 10세 정도의 사내애들은 새로 준비한 듯한 트레이닝 차림이고, 여자는 계절이 지난 체크무늬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셋은 우동 1인분을 시키고 2번 테이블에 앉았다. 주인은 삶지 않은 1인분의 운동 한 덩어리와 거기에 반 덩어리를 더 넣어 삶아 주었고 다 먹은 후 셋은 돈을 지불하고 나갔다.
이 책은 다소 부담스러운 친구에게 선물 받은 것이라서 꽤 오래 됐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열어보지 못하던 차에 독후감을 계기로 어렵사리 읽기 시작했다.
다소 무거운 시작이었으나 단편소설 두 편이 엮어진 책이어서 읽어가는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동 한 그릇´이라는 첫 번째 단편과 ´마지막 손님´이라는 두 번째 단편으로 이루어진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두께의 책으로 첫 번째 이야기인 ´우동 한 그릇´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일본에서는 섣달 그믐날이 되면 우동 집들은 일 년중 가장 바쁘다.
이 글을 읽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감정이 메마른 사람일 것이다. 이 글을 자신 있게 독자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만큼 이 책이 내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혹독한 세상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차츰 허물어졌던 순수한 내면의 마음을 다시 일깨운 나를 엄하게 질책한다. 세파의 때 묻지 않았을 순수한 인간의 감성이 자신의 어린 시절 누구나 꿈꿨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자문하게 만든다. 사실 이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냥 우동 한 그릇, 과자 한 상자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우동 한 그릇을 읽고 독후감을 썼었다. 그때의 난 세모자의 긍정적 마음과 우동 가게 주인 부부의 인품을 찬사하는 글을 썼던 것 같다. 이번에 읽을 때도 역시 우동 한 그릇의 등장인물들은 성품이 훌륭했다. 그래서 어차피 초등학교 저학년 때 썼던 독후감과 비슷할 게 뻔하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를 하겠다.
세모자가 한 그릇의 우동을 시키자 우동을 두 개 삶아주자는 부인과 그러지 말자는 남편. 부인 말처럼 우동 두 개를 삶아 줬다면 분명 세모자는 눈치 채고 부담스러워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개 반을 삶아 줬기에 눈치를 챘다하더라도 세모자가 매년 찾아 올 수 있었다. 분명 이 두 사람은 세모자를 배려했다. 하지만 이 두 배려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배려는 두 가지로 분류된다. 책 <배려>에서는 배려는 선택이 아니라 공존의 원칙이며, 사람은 능력이 아니라 배려로 자신을 지킨다고 말한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읽은 적이 있는 소설이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니 내 또래에서 안 읽은 사람을 찾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진 않았지만 슬프고 감동적이었던 것은 확실했다.
원고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옮겨 적으면서 처음 봤던 당시보다 집중하며 읽었다. 감성이 메마른 것인지, 삶이 팍팍해서 인지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았다. 필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문득 이 이야기가 실화인지 궁금해졌다. 말이 안 되는 내용이라 생각하지만, 일본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근거 없는 믿음이지만 검색을 한 번 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