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소유냐 삶이냐>는 에리히 프롬의 세밀한 관찰과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이론에만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프롬은 현실적인 변혁의 수단에까지 눈을 돌려서, 중앙집권을 배제하고 개인이 완전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참여민주주의'의 원리를 주장한다.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데 지침을 제공하는 책이다.
제목부터 독특한 이 책은 "소유냐 삶이냐" , 로 에리히 프롬이 쓴 유명한 저서입 니다.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모습과 가치를 되찾으려는 노력에 관 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 에리히 프롬은 독일 출신의 사회심리학자이자 철학자입니다. 그는 이 책 에서 현대 사회에서 부와 소유가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부분에 주목하여 소 유와 삶의 참 가치에 대해 탐구하고자 합니다. "소유냐 삶이냐"의 첫 번째 장에서는 인간이 왜 소유 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학교에서 이 책으로 독후감과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현대인의 생활양식을 소유와 존재로 이분하여 살펴보고 있다.
소유와 존재의 양극 사이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인간들에게 물질적 소유와 탐욕의 소유양식에서부터 창조하는 기쁨을 나누는 존재양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근무 중 우연히 병실을 옮겨야 하는 환자분과 조무원님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환자분, 옮길 짐은 이 가방이 전부인가요?”
“하하, 네. 인생은 짐 없이 살아가야죠.”
환자분의 말 한마디는 내 머릿속 느낌표를 만들었고, 지금 이 책장을 넘기게끔 도와주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며, 그리고 무심코 걷는 길가에도 우리는 수많은 광고를 마주치게 된다. 핸드폰을 통해 영상 하나를 보려 해도 광고는 피할 수 없다. 카페에서 문득 듣게 되는 사람들의 대화에도 집과 차, 최근에 서로가 구매한 것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렇게 우리는 끊임없는 구매의 유혹, 소비 지향적인 삶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의 저자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이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소비하는 것들로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종양내과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환자분들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했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순간들을 곁에서 함께하며 나 스스로에게도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소유’와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고 다양한 일상적인 경험에서 소유양식인지 존재양식인지에 따라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다루고 있다.
일상적 경험 중 학습의 경우 소유와 존재에 따라 어떤 양식의 학습을 하는지가 흥미로웠다. 나 자신이 현재 대학생이고 매일같이 학교에 나가 강의를 듣기 때문이다. 저번학기에 전공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며 이번학기에는 전공과목에서 기필코 좋은 점수를 받으리라 다짐하였다.
<중략>
책의 내용과 같이 어느 부분에서든 존재적 삶을 사는 사람이 소유적 삶을 사는 사람보다 능동적,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만 둘러봐도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깊은 성찰을 하지 않는 이상 무언가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쾌감을 느끼도록 하는 본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소유냐 삶이냐의 작가 에리히 프롬은 두 가지 사상을 갖고 책을 작성했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분석을 집중적으로 하며 급진적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상과 현대 사회의 위기와 해결의 가능성에 대해 이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다. 작가는 자연지배, 물질적 풍요, 최대행복, 개인의 자유 보장을 무한한 진보이자 위대한 약속으로 본다. 산업시대 이후에도 위대한 약속은 변동되지 않고 있다. 시대가 흐르면서 인간은 자유를 경험하게 되고 더욱 갈구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부르주와 적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운동 뿐 만 아니라 무한한 진보에 대한 열망은 종교를 만들었다. 종교는 신자들에게 활기와 희망을 주었다.
인간은 산업화를 통해 초인이 되었다. 그러나 초인적인 힘을 가졌으나 이성은 초인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복지와 복리 그리고 쾌락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쾌락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모든 것은 소유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공유가 아닌 소유에서 쾌락이 나온다고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소유와 존재에 대해 나뉘기 시작한다. 작가는 소유와 존재는 다른 것으로 표현하였다.
- To Have Or To Be
<소유냐 삶이냐> 라고 번역되었지만 이 책의 원문 제목은 <To Have Or To Be>이다. To Be를 삶이라고 번역한 것이 다소 의아스러웠지만 책을 이해하면 이러한 제목이 나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보다 정확한 표현은 “소유냐 존재냐”가 될 것이나 To Be Or Not To Be, it is the Question에서처럼 존재란 곧 삶을 뜻하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인 에리히 프롬은 소유의 반대 가치에 존재를 두고, 존재의 의미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강조한다. 즉, 소유하고자 하면 살 수 없고, 존재하고자 하면 살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고 숱하게 들어온 두 단어, 소유와 존재. 에리히 프롬은 이 두 단어만으로 수많은 사회문제를 멋지게 통찰해내는 학자이다. 그 점에서 일단 감탄을 시작하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일상 생활 경험에 있어서 소유와 존재
소비는 오늘날 중요한 산업사회의 가장 중요한 소유형태인 것이다. 즉, 나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소비함으로써 나는 존재한다. 소비는 모호한 특질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소비해 버렸기 때문에 빼앗기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에서 소비는 걱정을 경감해주지만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더 많이 소비할 것을 요구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전의 소비가 곧 그 만족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이 책에서 소비라 함은 물질적인 것과 문화자본도 포함한다.)
권위, 합리적인 권위는 능력에 기초를 두고 비합리적인 권위는 권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존재의 권위는 어떤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개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와 똑같이 고도의 성장과 완성을 성취하는 인격의 정수에 근거를 두고 있다.
믿음,소유양식에 있어서 믿음이란 확신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 즉 감히 스스로 찾아 나서지 않으면서도 인생에 대한 대답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버팀목이다. 존재양식에 있어서 믿음이란 어떤 관념들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내적 지향, 즉 하나의 태도이다. 존재양식에서 신에 대한 믿음은 자신 속에 있는 신적특성의 내적 경험에 의해 보증되고 있으며 그것은 끊임없는 능동적인 자기 창조의 과정이다.
사랑, 결혼계약은 파트너가 각자에게 상대방이 육체, 감정 및 관심의 독점을 가져다준다. 사랑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 즉 하나의 재산이 되었기 때문에 상대방을 이기려고 할 필요가 없고 사랑을 연출하지도 않으며 그들은 권태를 느끼고 당혹해 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대신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돈, 사회적 지위, 가정, 지식 등을 함께 소유하는 것에 안주한다.
사랑을 기반으로 해서 시작된 결혼이 다정한 소유의식으로 두 이기주의가 뭉쳐진 가정이라는 법인으로 변경된다. 그러나 사랑이 소유양식에서 경험 될 때 그것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제한하고 감금 하고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집단결혼, 파트너 교환, 그룹섹스 등과 같은 공동생활 양식의 주창자들은 한사람만을 사랑할수 있기 보다는 항상 새로운 자극으로 권태를 치료함으로써 여러 연인들을 소유하기를 원함으로써 문제를 회피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소유냐 삶이냐는 에리히 프롬의 세밀한 관찰과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이론에만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프롬은 현실적인 변혁의 수단에까지 눈을 돌려서, 중앙집권을 배제하고 개인이 완전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참여민주주의'의 원리를 주장한다.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데 지침을 제공하는 책이다. 먼저 저자를 소개하면 에리히 프롬은 ‘프로이트 좌파’라 불리는 사회 심리학자로, 프로이트의 ‘개인 심리학’을 ‘사회 심리학’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인간 심리의 문제는 단지 그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성격의 문제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필자는 두 가지 점에서 프롬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써 인식한다는 점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정신에서는, 개인은 개인이다. 그의 죄는 온전히 그의 죄악이고, 그의 재산은 그의 소유물이다. 그러나 프롬은 ‘개인은 개인이다’라는 명제는 거대 산업의 지배를 받는 미디어가 대중의 심리를 조작할 수 있음이 알려진 후, 공허한 외침으로 전락했다고 말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사회와 떼어 놓고 볼 수 없는 존재라고 보았기에 ‘사회 심리학’이 성립할 수 있었다. 프롬이 제창한 ‘사회 심리학’의 핵심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유형의 실존 방식에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소유적인 실존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적인 실존 방식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소유를 통해서 사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성이고, 자본주의의 시대에 부활한 그리스 로마 신화이다. 이것은 투쟁하고, 빼앗고, 지배하고, 차지하는 인간의 삶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투쟁하여 빼앗아 ‘가지고 있는 것’을 통해 산다. “내가 누구냐 하면, 나는 00기업의 000이사외다, 나는 고교 시절 0등을 했고, 00대학교를 졸업해서, 00기업의 사장의 딸과 결혼해 2남 2녀를 가지고 있소.” 이와 같은 소개는 소유 유형의 전유물이다.
에릭 프롬 Fromm Erich 의 <소유냐 삶이냐(To Have or To Be)>라는 다소 생소한 제목의 책을 앞에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소유와 삶이라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두 단어 가운데에서 선택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생소하기만 했던 것이다. 소유라 하면 사물을 내 것으로 가지게 되는 행위를 뜻하고, 삶, 존재라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전체적인 흐름을 말한다고 단순히 생각하고 있던 터라 생소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알 수 없는 생소함을 없애지 못한 체 <소유냐 삶이냐>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책의 서론에 의하면 무한한 발전이라는 ‘위대한 약속’은 여러 세대에게 희망과 믿음을 심어주었다. ‘위대한 약속’에 따라 사람들은 기술(技術)은 우리를 전능하게 하고 우리는 자연세계를 새 창조를 위한 벽돌로 삼아 산업화를 유지하며 그 결과로 만인이 성취하는 부(富)와 안락은 만인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대한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인간은 더욱 많이 소유할수록 더욱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소유의 향한 열정에 의해 유발된 계급전쟁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소유에 의한 탐욕스러움은 8세기 자본주의를 겪으면서 한층 더 하게 되었다. 8세기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발전은 자연과 인간관계를 적대적으로 만들었고 오늘날 사람들이 ‘기계적인 것, 강력한 기계, 생명이 없는 것’에 이끌려 점점 더 파괴를 향해서 전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 아무런 노력도 행해지지 않고 있다. 이는 지도자의 이기주의적인 태도보다 사람들이 지금 감수해야 할 희생보다 차라리 미래의 재난을 택하려 한다는 생(生)과 사(死)의 문제에 있어서의 인간의 치명적 수동성에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기업적 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 또는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기술주의적 파시즘의 모델에 대하여 다른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 역시 큰 문제로 여겨진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소유’에 대해 깊게 생각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면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몸소 느껴왔듯이 소유는 사람을 탐욕스럽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여러 재난을 겪어왔다. 나 역시도 소유에 대해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고 오히려 지나치지 않다면 소유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유가 우리의 삶, 존재를 방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소유’와 ‘존재’의 선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