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녀' 주변에서 계속 서성이고 있는 내 자신이다. 잡지, 비디오 등 '욕망'을 대체할 만한 문화는 모두 거세된 채 생식을 위한 성(性)만이 존재하는 전제국가 '길리아드'에서 오직 수태만을 강요받는 '시녀' 오브브레드. 그녀의 시선을 통해 내밀한 욕망과 만나는 일. 그래서...
시녀이야기는 체제에 대항하는 혁명군의 영웅적 서사가 아닌 오브프레드라는 이름 없는 한 여성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파익소토 교수는 그런 시녀이야기에 대해 ‘역사의 여신이 우리에게 남겨 주신 빵 쪼가리’라고 묘사하며 ‘워터포드의 개인 컴퓨터에서 20페이지 정도만이라도 출 력한 인쇄물을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하버드생들이 많이 읽어본 책이라고 해서 어떤 책인가 해서 읽어봤다. 문체가 난해했다. 문체가 난해하다는 것은 작가의 독특함을 드러내는 부분이고 번역가의 수고가 엿보이는 곳이라 예민하기도 하면서 번역가의 역량에 따라 극찬과 비난을 오가는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한다. 문체에 대해 익숙해지는 것이 개인적으로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특히 번역된 소설을 보는 경우에 그렇다. 원서로 읽는 것이 가장 베스트이지만 언어능력이 그 정도로 출중했으면 필자는 아예 원서를 사서 읽었을 것이다.
‘아이를 갖지 못하면 죽임을 당하는 세상’. 언젠가 스치듯 본 이 책의 소개 글에 있었던 내용이다. 참 극단적이고 잔인하게 느껴지는 저 문구에 이끌려 시간이나 한 번 때워보자 하는 생각으로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후 한 생각은, 이 책은 저 홍보 문구보다 훨씬 끔찍한 세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1985)는 쿠데타로 인해 ‘길리어드’ 정권이 들어선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여성은 철저히 남성에게 구속된 존재로 그려진다. 특히, 작중 ‘시녀’는 오직 출산을 위한 ‘걸어 다니는 자궁’으로 묘사된다. 시녀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으며, 자신이 낳은 아이들마저도 자신의 아이가 아니다. 길리어드에서 여성은 완벽하게 도구화되었다. 가장 높은 계급의 여성마저 남성의 소유물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고 있다면, 이 소설을 완전히 판타지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임기 여성은 저출생 문제를 온몸으로 떠안고 있다. 비혼과 비출산을 선언하는 여성들이 애국심이 없는 파렴치한으로 내몰리는 일은 매우 흔하다. 여성의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은 채, 아이를 낳지 않는 행위 자체로만 비난을 가하기 때문이다.
현재 제정신인 여자라면 임신과 같은 행운을 안고서 의사를 찾아가 유산시켜 달라고 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p. 64.)
<시녀 이야기>는 1980 년대에 출간되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세련된 감각으로 디스토피아를 그려낸다. 기근과 저출산률로 고전하던 미국 사회에 성경을 근간으로 한 신흥 세력이 부상하여 ‘길리아드’라는 전체주의 국가를 탄생시킨다. 이 우아하고 고약한 세계에서 여성들은 철저히 계급으로 분류된다.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계급에 따라 철저하게 분리된 생활을 영위하고 누구라도 그네들의 복장을 통해서 어떤 계급에 속해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들을 구분 짓는 기준은 무엇인가? 다름아닌 생식성이다.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하얀색 머리를 쓰는 ‘나’는 시녀 계급으로, 생식성을 인정받아 사령관의 아이를 수태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진다. 물론 이것을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때의 말이겠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밖에 있는 사람들. 여기 내가 이렇게 복에 겨운 삶을 누리고 있는 이 곳은 국가의 심장부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감사하는 마음을 내려주시기를. (p. 117.)
시녀들은 출산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노동으로부터 제외된다. 사실상 그들은 생식을 제외한 모든 행동을 규제 받고 있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서도 가만히 천장만을 바라보아야 하며, 배설이라는 기본적인 욕구마저 삼엄한 감시 하에 일정한 횟수로 제한된다. 우리 속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가축과도 다름없는 신세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행운이라고 여기도록 개조된다. 평생 가혹한 노동만 하다가 죽음으로 몰리게 되는 최하층 계급인 ‘비여성’들과 비교하자면 시녀들의 삶은 특권 의식을 느껴 마땅하다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여성들을 나누는 기준이 오직 생식 능력이라는 사실을 이미 살펴본 적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와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는 페미니즘에 있어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전자는 유명한 페미니즘 문학이고 후자는 페미니즘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페미니즘의 이론 형성에 큰 기여를 한 작품이다. 나 또한 두 책을 읽으며 일정 부분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시녀 이야기> 속 가장 흥미롭게 느껴졌던 길리어드의 사회와 시녀라는 존재를 푸코의 성의 역사 속 관점을 통해 관찰하고 분석해보고자 한다.
시녀이야기에서의 ‘시녀’는 출산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여성들이 고위층의 남성들의 아기를 낳기 위한 일을 하는 여성들을 뜻한다. 주인공은 물론 많은 여성들이 정부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며 여성이라서, 여성이기 때문에 재산소유를 금지하고 남성의 지배아래에서 생활하게 된다. 또한, 여성이 출산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그 기능을 활용하는 데에 인생을 쏟아붓도록 만든다. 성서에 나오는 야곱의 아내 라헬과 몸종 레아의 관계처럼 설정하여 출산기능이 없는 ‘아내’ 대신 출산의 기능을 가진 ‘시녀’가 아이를 가져 낳게 하는 것이다. 즉, 한 여성을 남성들의 씨받이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출산의 기능이 없는 여성들은 ‘하녀’로 구분해 각종 집안일을 하거나, 비여성으로 구분되어 비참하게 살다 인생을 살다 떠난다. 사령관의 부인, ‘아내’까지 포함해서 여성들은 지휘, 계급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옷의 모양, 색깔을 맞춰 생활하게 한다. 여성을 사적소유 즉, 재산처럼 분류해 한 집에 남성인 ‘사령관’이 ‘아내’, ‘시녀’, ‘하녀’를 소유하게 되어 여성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