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수난을 통해 구원’으로 이르는 사도 바울적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 준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황순원 문학의 창조적 정력이 절정으로 표출되던 40대 중반기의 대표작이다. 비탈에 선 나무처럼 6·25라는 민족 최대의 비극에 상처받고 몸부림치면서도 끝까지 구원의 삶을 갈망했던 젊은이들의 희생과...
‘이 바보’, ‘난 보랏빛이 좋아’ 등등, 중학교 때 소나기를 읽고 나름 순수한 마음으로 설레고 했던 기억이 남아있어 황순원 작가의 소설을 고르게 되었다. 그렇게 내 마음에 티끌만치 남아있을지도 모르던 순수함이 박살났다. 황순원으로 시작된 내 순수함이 황순원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이 이야기만 들으면 절대 읽어서는 안 될 소설 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 소설은 나의 순수함을 깨버릴 만큼 전쟁이라는 비극적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의 순수함과 맞바꿔서라도 꼭 알아야 될 현실을 말이다.
동호란 인물을 살펴보면, 연인인 숙이를 지독히도 아끼는 모습으로 나온다. 하지만, 동시에 옥주랑 몸을 섞고는 홀로 사랑을 하게 되어 참지 못 하고 총으로 쏴 죽인다. 현태도 마찬가지다. 군 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과의 의리를 지키나, 장숙에게는 잔혹하게 성폭력을 가한다. 윤구 역시 다를 바가 없다. 출세할 목적으로 미란이와의 결혼을 꿈꾸다가 좌절되자 낙태하게 만든다. 이에 대하여, 마치 작가는 전쟁이란 외부상황이 젊은이들을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 옥주에게 화를 참지 못 하는 것과 출세할 목적으로 미란이를 이용하다가 버리는 것 등은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다른 등장인물 중 석기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역시 전쟁으로 인해 육체적 상처를 입고 그로부터 비롯된 정신적 고통까지 안고 있다. 그렇지만, 여자를 이용하다 버리거나 좋아한다는 마음을 참지 못 해 죽여 버리거나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강간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