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저자에 의하면 현대 문명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식생활이다. 특히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파생되기 시작한 문제는 여러 분야에 걸쳐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한 예로 제레미 리프킨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12억 8천 마리의 소들이 전세계 토지의 24%를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 곡물의 70%를 소를 비롯한 가축이 먹어치운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굶주리고 있는 인간 수억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다. 동양인들도 점차 육식의 비중이 커지고 있으며 서구 사회의 전철을 밟고 있다.
제레미 리프킨이 쓴 책은 소를 비롯한 가축 생산과 소비가 불러온 여러 현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거기엔 환경 문제와 식량 자원의 불균형, 그리고 인간이 식생활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 들어 있다. 책 속에서 가장 놀라웠던 통계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소의 수가 12억 8천만 마리라는 부분이었다. 그 수많은 소가 차지하는 땅이 지구 육지의 약 24%라고 한다. 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산림이 사라져왔는지 상상하기 힘들다. 처음엔 사람들의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곡물을 재배했을 텐데, 지금은 그 곡물의 상당 부분을 축산에 쓰고 있다. 미국의 경우엔 총 곡물 생산량의 70%가 가축을 위한 사료로 투입된다고 적혀 있다. 그렇게 소비된 곡물을 사람들에게 직접 나눠줬다면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허기를 면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저자가 제시하는 여러 수치는 일반 독자가 접하기 쉽지 않은 자료라서 생소한 느낌이었다. 소가 내뿜는 메탄가스가 온실가스 증가에 기여하는 양이 결코 무시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새로웠다. 교통수단에서 나오는 온실가스만 문제인 줄 알았는데, 축산업이 배출하는 양 또한 상당하다는 점은 충격이었다. 읽어나가면서 육식이 환경 파괴를 가속화하는 고리가 된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땅과 물, 그리고 에너지가 대량으로 소모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이 행성의 자연 순환을 거칠게 뒤흔든다. 예전엔 특정 지역에서만 문제가 되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식습관이 육류 위주로 변해가며 문제도 커지고 있다. 특히 동양권에서도 채소 중심 식단이 줄어들고 고기 섭취가 증가하는 추세라서 앞으로 심각한 결과를 맞이할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진다.
기억에 남는 대목 하나는 소의 사료용 곡물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농약과 비료 문제다.
쇠고기가 어떻게 산업화가 되었는지 그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고 현재 사육 시스템이 어떻게 구축이 되어 있는지도 나름 상세하게 소개를 한 책이었다. 육식의 함정이 상당히 많이 보이는데 가축은 보통 인간에 비해서 사료라고 하는 것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소비를 한다. 식물 사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육식을 좋아하고 산업화를 시키면서 식물 같은 것들은 가축에 비해서 부족해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해가 잘 되었다. 또 소고기 산업화의 가장 큰 비결이자 핵심은 냉동 보관이 가능해지면서부터였다고 한다. 냉동 기술이 좋아지면서 점점 더 먼 지역까지 위생적이고 안정적으로 쇠고기를 공급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쇠고기 소비는 부의 상징으로 나온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한국에서도 돼지고기 소비가 가장 많다고 생각이 되는데 쇠고기는 일반 서민들도 매일 소비할 수 있는 고기 재료는 아니다.
인도 사람들이 소를 안 잡아 먹는 건 너무 유명해서 알고 있었다. 종교 때문에 그런 것이라서 좀 이론의 여지가 있기야 한데 그래도 소를 잡아 먹지 않고 놔두는 것, 중용, 그런 예시로서 활용이 될 수는 있다고 본다. 영국 이민자들이 미국을 점령하고 인디언을 굴복시키는 과정도 가축을 몰아세우는 것이 통했던 것으로 이야기한다.
인간의 잔혹함은 어디까지인가? 육식을 하는 한 다른 생명체를 먹는 것은 불가피하다. 고상한 척을 해보지만 슈퍼마켓에서 고기를 구매하는 나 역시 공범이기도 하다. TV 예능프로그램인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는 세 쌍둥이가 처음으로 다양한 고기를 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새우, 오리, 물고기를 먹는 것을 학습하는 장면이 나올 때 나는 문득 인간이 같은 생명체를 먹는 것이 어쩌면 무섭고 두려운 감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인들은 양심의 부담을 덜기 위해 먹이 동물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도록 고안된 일련의 장벽들을 설치한다. 먹잇감 동물과의 친숙한 관계를 제거함으로써, 생명을 죽이는 것에 수반되는 두려움, 수치심, 혐오감, 후회의 감정을 극복하는 것이다. 정육점은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나는 평소 닭고기를 비롯해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좋아한다. 고기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몸에 이로운 영양소들이 있어서 육류를 즐겨 먹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육류가 어떻게 우리의 밥상에 오게 되었는지 그 배경에 관해 설명하며, 육류를 고집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연 생태계가 점차 황폐해가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동물을 죽이는 것을 합법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된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책을 읽어보니 육류 가공은 동물에게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도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목축산업이 거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목축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꽤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제목에 이끌려 한 번 읽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기회가 돼서 다시 읽어보니,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과 깨닳음이 있었다.
전에는 그 책을 읽고도 육식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냥 고기를 쉽게 먹었다. 그러나 지금은 확실히 달라졌다. 육식을 그리도 좋아하던 내가 이젠 고기를 봐도 그다지 맛있어 보이지 않는다. 신선한 채소가 더 나의 몸에 좋고 상쾌한 맛도 있어서 이젠 채소가 더 좋다. 오늘날 지구에 존재하는 소의 수는 무려 12억 8000만 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소의 무게를 모두 합치면 모든 인간의 무게를 합친 것보다 많이 나간다고 하니, 그야말로 쇼킹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부터 소를 먹기 시작했고 왜 먹은 걸까? 수 천년 전에 고대 이집트에서는 황소를 신으로 모셨는데 황소 신은 엄청난 체력과 생식력, 그리고 전쟁의 승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숭배를 받았고 황소 신을 육체화한 특별한 황소를 데려다가 제사를 지내고 제사가 끝난 후 그 황소를 죽여 살코기를 먹음으로써 황소 신과 같이 당당한 체력과 남성다움을 닮고 황소 신과 일체를 이루어 영생을 얻고자 했다고 한다.
p.145
“소는 거대한 존재의 사슬에서 또 다른 위치로 격하되었다. 내세에서 생성을 나타내는 표상이 세속화되고 사지가 절단되어 스위프트나 아머과 같은 효율성을 열렬하게 신봉하는 회사들에 의해 표준화된 생산 단위로 전락했다. 유사 이래로 수천 년간 서구 문화에서 숭배되어왔던 이 고귀한 피조물들은 체인과 궤도 장치에 매달린 채 순식간에 작업장의 각 구획을 거치며 잘리고 나뉘어지고 가공되어 결국 생산 라인의 끝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나오는 것이다.”
이 텍스트가 유래 없는 육식의 광풍을 맞이한 근현대의 실정을 축약해서 나타내었기에 인용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치킨, 스테이크, 삼겹살 등을 먹는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먹고 있는 고기가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모를 것이다. 아마 이 사람들은 진실을 알게 되면 깜짝 놀라 당장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고기를 위해서 사육되는 동물들은 끔찍할 정도로 더럽고 비좁은 환경에서 비인도적으로 다뤄지며, 심지어 필요하지 않은 일부 동물들은 잔혹하게 죽여버리기도 한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기를 먹음으로써 세상의 사람들이 몇 명이나 굶주림이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육식의 종말이라는 책을 통해서 자세한 것을 알아보자.
육식, 특히 소의 문화는 예전부터 계속 이어져 왔다. 소는 그리스 등지에서 신으로 여겨져 왔고, 남성과 힘 등의 상징물이었다. 또한, 수소들은 고기를 제공하였으며, 암소들은 우유를 제공하는 등 식량 자원이기도 하였다. 이토록 유익한 소들에게는 안 좋은 역사가 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기까지 우리 남매는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온돌을 쓰는 한옥이었다. 넓진 않지만 마당이 있었고, 그 마당을 따라 큼지막한 돌로 쌓아진 담벼락이 있었다. 마당 한 구석에는 외할아버지가 산에서 해 오신 장작이 산더미처럼 늘 쌓여있었고, 장작의 연기 때문에 검게 변한 부엌 뒤편에는 된장, 고추장을 담던 황갈색의 옹기항아리가 있었다. 밤에 화장실을 갈 때 엔 곤히 잠든 외할머니에게 앞에 있어달라고 부탁해야만 했던 냄새나지만 무서운 재래식 화장실도 있었다. 우리의 부모님 세대의 ‘내가 어릴 적에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런 시골집이었다. 그 시골집의 맨 끝에는 내 기억 속의 외할아버지의 모습에 항상 등장하는 큰 소 한 마리가 있었다. 농사를 지으시던 외할아버지는 새벽 동틀 무렵에 일어나서 해가 질 무렵에야 집으로 들어 오셨었다. 외할아버지 옆에는 늘 황갈색의 소 한 마리가 붙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소는 내가 외할아버지와 보낸 시간 보다 더 많은 시간을 외할아버지와 함께 하고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