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민족적 수난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하근찬의 대표 단편명작의 새로운 발견 「아이세움 명작스케치」시리즈는 국내외 문학사에서 빛나는 작품들을 초등 학생들이 보다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그림책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꾸몄다. 원전을 그대로 살린 글에 텍스트를 뛰어넘는...
전쟁의 상흔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애와 희망, 그리고 깊은 울림
하근찬 작가의 단편소설 수난이대는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역사적 배경 속에서 두 아들을 잃고 불구가 된 만도와 그의 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그린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히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애와 희망을 통해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울림을 선사합니다.
박만도는 팔 하나가 없다. 2차 세계 대전 때 일본의 횡포로 강제 징용에 끌려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팔 하나를 잃어야 했다. 그 박만도의 아들 진수가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살아 돌아온다는 소식에 박만도는 기차역으로 아들을 마중 나간다. 대합실 시계는 낡고 먼지가 쌓인 채 멈춰 있었다. 2시 20분으로 박제되어 있었다. 만도는 아들 진수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돌아오는 길이라는 통지에 ‘나처럼 되지는 않았겠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진심으로 자신처럼 되지는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겠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겠지만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확인하게 될 뿐이었다.
기차역에서 만난 진수는 목발 대신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며 나타났다. 가벼운 부상도 아니었다. 지팡이는 두 개였지만 진수의 다리는 하나였다. 그 반대였어야 했다. 지팡이 하나에 두 다리. 설마 했던 박만도의 기우가 현실로 나타났다. 팔 하나가 없는 아버지와 다리 하나가 없는 아들이 마주한 순간 기차역 대합실의 고장 난 시계처럼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다.
제목 ‘수난이대’를 처음 봤을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수난, 즉 고난을 겪는 아버지와 아들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겪는 ‘수난’이라는 뜻이었다. 제목의 뜻을 깨닫고 나니 아버지와 아들이 무슨 고난을 겪었을까? 그리고 이 고난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까? 라는 궁금증이 나의 뇌를 자극했다. 그리하여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쳤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 때 전재에 징용되었다가 팔 한쪽을 잃은 만도와 그의 아들 진수가 나온다. 만도는 6.25에 끌려갔던 진수가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을 기쁜 마음에 고등어 한 손을 사고 마중을 나간다. 만도는 설마 자신처럼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었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진수는 다리 한쪽을 잃었다. 만도는 화나고 슬퍼서 진수를 앞질러 주막으로 가 술을 마신다.
수난이대는 하근찬 작가의 단편소설이다.
현실의 어두움을 글로써 표현하지만 그 안에서 해학을 잃지 않고 작품을 쓰신다.
주로 역사적 상황과 대응되어 문제점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있다.
작가는 한국일보에 단편 ‘수난이대’가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게 되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아들이 돌아오는 날이다.
만도는 아들 진수가 돌아온다는 기대를 하면서도 무사한지 혹시 자신처럼 장애를 입은 것은 아닌지 걱정을 한다.
만도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인해 한 쪽 팔을 잃었다.
그는 아들을 위해 고등어를 사고 기차역에 선다. 그러나 멀리서 보이는 아들의 바짓부리가 바람에 흔들린다.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 35년간의 일제강점기 후 독립했으나 5년 후인 1950년 6.25전쟁. 고조선 때부터 수많은 나라의 침략을 받아 온 나라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지난 백년을 돌이켜보면 유독 안타까운 일들이 많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기에 더 가깝게 느껴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참으로 가슴 아픈 근·현대사이다. 그 중심에 있는 사건은 물론 그 당시를 기록한 문헌을 읽는 것도 가슴 아픈 일제강점기와,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불리는 6.25 전쟁이다. 교과서 수록 작품이라 그리 낯설지는 않은 「수난이대」는 바로 이 두 사건을 중심으로 부자가 겪게 되는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징용을 나갔다가 공습으로 인해 팔을 잃은 아버지와,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수류탄 조각을 맞고 다리를 잃은 아들. 우리 민족의 잇따른 비극을 가장 극단적으로, 또 가장 간결하게 제시한 것이라 생각하니 새삼 감탄을 하게 된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쉽게 읽히는 작품이지만, 다루고 있는 소재가 그리 단순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진수가 돌아온다. 진수가 살아서 돌아온다. 아무개는 전사했다는 통지가 왔고, 아무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소식이 없는데, 우리 진수는 살아서 오늘 돌아오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어깻바람이 날 일이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박만도는 여느 때 같으면 아무래도 한두 군데 앉아 쉬어야 넘어설 수 있는 용머리재를 단숨에 올라채고 말았다.
1. 만도는 일제 때 징용에 끌려갔다가 한 쪽 팔을 잃었고 아들 진수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 한 쪽 다리를 잃은 불구의 몸이 되었다.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던 와중에 아들 진수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만도는 분노하며 울분을 터뜨린다. 자신과 같은 종류의 아픔을 똑같이 경험하게 된 아들을 바라보는 만도의 심정이 상상이 되며 이해가 가서 안쓰럽다. (심리적 효과)
2.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 소설이 쓰여졌을 당시 시대를 살았을 독자들은 그들의 세대에 따라 각각 아버지인 만도와 그 다음 세대인 진수 부자의 아픔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리적 효과)
수난이대? 수난 이대란 무엇인가!
나 또한 수난 이대라는 단어 앞에 이러한 말을 수 없이 되었다.
책장을 펴고 단편소설인지라 부담감 없이 편하게 읽어나갔다.
이 글의 시대적 배경은 우리에게 너무나 아픔을 주었던 바로 6.25 전쟁이다.
아버지는 이 전쟁에 나가 너무나 운이 없게도 적군에게 날아오는 수류탄에 튀어오는 파편을 맞아 한쪽 팔이 없으셨다.
그리고 그의 아들도 일본 전쟁에 징용으로 끌려나갔다.
하루 하루 그의 아버지는 아들 생각에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살아 있고 오늘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정류장으로 향한다.
우리 민족에게 근래 100년간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은 1910년 한일합방과 동시에 일제에 의한 국토 침탈과 1950년 민족분단으로 인한 6.25 전쟁일 것이다. 수난이대는 가장 아픈 상처를 한 가족사로 옮겨 놓아 2대에 걸친 수난을 작품을 통해 더 또렷하면서도 가슴 아프게 그려냈다.
아버지는 일제 징용에 끌러가 한 팔을 잃고, 아들 진수도 6.25 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는다. 국난으로 인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운명을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만도는 속으로 ’인제 새파랗게 젊은 놈이 벌써 이게 무슨 꼴인고! 세상을 잘못 타고나서 진수 네 신세도 참 똥이다 똥‘
아버지 만도가 속으로 외친 것처럼 정말 세상을 잘못 만나서 험한 꼴을 당하게 되었다.
만도는 읍내 나올 때마다 주막에 한 번씩 들러서 술을 마신다.
요즘 역사 수업 시간에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에 관해 배우고 있다. 비참했던 식민지 생활 그리고 짧은 독립의 기쁨, 또다시 찾아온 전쟁과 분단의 고통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공감이 가는 것 같다.
이 부분을 배울 때 선생님께서 그 시대를 바탕으로 한 문학 작품을 찾아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님 말씀을 듣자마자 소설 한 편이 떠올랐다. 일제 강제노역 때문에 팔 한쪽을 잃은 아버지와 6.25 전쟁 참전 때문에 다리 한쪽을 잃은 진수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수난이대’가 바로 내가 떠올린 소설이었다.
미래의 내 꿈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육군 장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작품 중, 군대와 관련된 작품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우리나라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을 소재로 다룬 소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이 소설에 6.25 전쟁의 긍정적인 면보다는 아픔과 비극에 초점을 맞추어 읽어보았다. 그래야 다시는 이런 전쟁의 참화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난이대’란 소설은 중학교 2학년 국어 시간에 처음 접해본 소설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소설을 다시 손에 들었다. 수난이대라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 인물인 ‘만도’와 ‘진수’. 나는 이 두 인물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만도와 진수 이 두 인물은 허구적인 인물이지만 너무도 비극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