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랑의 인생은 한 편의 연극이었다. 능원대군의 11대 손으로 왕가의 후예로 태어나 연극배우로 활동하면서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그리고 경제 발전기를 지나며 한국 연극사의 거인으로 우뚝 섰다. 여기에 대학교수와 국회의원까지 지내며 정말 다양한 배역을 거친 연극 같은 삶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이해랑의 부친은 세브란스 병원의 외과의사로 부유한 집안이 었기에 일본으로 유학까지 떠나 대학까지 졸업한 그가 배우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배우의 인식은 현재처럼 좋지 않았고 천한 직업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특히 조선시대에서부터 현대의 연예인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놀이패, 광대, 기생 등은 팔반사천이라 불리며 천민으로 취급되어 왔다. 이러한 인식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그들을 선망하는 동시에 경멸하거나 비웃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엄청난 집안의 반대가 있었음은 짐작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