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잘못 알려진 역사 속 광해군의 모습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저자는 남겨진 자료를 바탕으로, 광해군의 극적인 삶과 행적, 그리고 그의 시대를 그려내었다. 아버지 선조의 뒤를 이어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의 어린시절부터 외교전문가로서 모습까지 색다른 시각으로 살펴본다.
1. 서론
광해군이 왕위에 있던 17세기 초반은 외세와 국내의 문제가 얽혀 있던 시대다. 중국에 순응하고 사대주의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조선 나름대로 외교와 정책을 펼쳐 나갈 것인가? 두 가지의 대립한 관점 속에서 국내 정세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역사의 전환기 속을 거닐었던 광해군의 대처는 주목해 볼 만하다. 지금 이 땅의 우리 또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지만, 여전히 한반도에는 열강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만 열강의 입김을 넘어서서 자신의 힘으로 통일을 이뤄 낼 수 있을까? 이 중대한 과제를 앞에 둔 우리에게 역사 속 광해군의 업적과 생각, 그리고 그의 시대는 분명 새로운 시사점을 줄 것이다.
한명기의 『광해군』은 광해군에 대한 저자의 포용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한 역사 비평서이다. 내용은 광해의 어린 시절, 임진왜란 당시의 광해군, 정인흥·이이첨과의 인연, 전후 광해의 정책, 왕권 강화 정책, 탁월한 외교 정책, 광해의 최후 등을 작가만의 관점으로 풀어내고 있다. 따라서 본문 또한 이 흐름을 따라 서평문을 전개해 보고자 한다.
2. 한명기의 『광해군』
2.1. 광해의 출생부터 세자까지
광해는 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와 김희철의 딸 공빈 김 씨의 둘째 서자로 태어났으며 친형으로 임해군이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광해군에 봉해졌으나 어려서 어머니 김 씨가 죽은 이후 선조의 냉대 속에서 자랐다. 외조부인 김희철마저 전쟁 중에 전사하면서 기댈 곳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에게 따로 적자가 없었고, 임해군이 인격이 미덥지 못하여 광해가 세자가 되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세자 책봉 문제를 거론하지 못했으나, 신성군이 피난길에 죽으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된 것이다. 광해군은 전쟁 중에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뒤 선조가 피난 가고 없는 궁을 지키면서 전란 수습을 했다.
조선의 제15대 왕, 광해군. 광해군에 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그는 폭군이었을까 성군이었을까. 사실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광해군이 폭군이라고 생각했다. 중립외교를 이뤘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했지만, 어린 영창대군을 잔인하게 죽였기 때문에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한명기의 ‘광해군’을 읽고 나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고, 특히 고등학생 때 한국사 시간에 배운 광해군에 관한 역사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군주로서의 광해에 대해 이야기하고 평가를 하는데, 책을 통해 인간 광해에 대해 알 수 있었고 그의 삶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을 읽기 전, 네이버 검색창에 ‘광해군’을 검색해보았다. 연관 검색어로는 ‘광해’. ‘연산군’, '인조반정‘, ’광해 왕이 된 남자‘, ’연산군 광해군‘ 순서로 있었고, 그다음으로는 ’광해군 폭군‘도 있었다. ’광해군 업적‘은 마지막 연관 검색어였다.
Ⅰ. 들어가며
1599년, 7년간 전 국토를 헤집으며 전란이라는 이빨로 많은 상처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명이 쇠퇴하고 후금은 강성해지고 있는 급격한 세력변화가 일어났고, 내부적으로는 당장 공명첩의 남발로 인한 재정문제, 정통성의 부재로 인한 왕권약화, 전란이 남긴 무수한 상처들을 복구해야 하는 막대한 책임이 다음 세대 왕에게 지어져 있었다. 선조의 다음 왕인 광해군은 이러한 문제를 지어야 했고, 부왕의 견제로 정신병을 안고 있던 광해군은 계축옥사를 일으켰고, 그 결과 반정의 명분이 되어 1623년 서인 세력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의하여 왕위에 쫓겨나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1698년 그는 결국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이러한 광해군에 대해 한명기는 그는 결국 실패했고 비극적 최후를 맞았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난 그의 삶은 극적인 것으로, 역사 격동의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우리가 한 번쯤은 반추해 볼 만한 역사적 교훈들을 무수히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광해군에 대해 정확히 몰랐던 나로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책을 통해 저자가 광해군 대의 사건들과 현 한반도 정세를 연결지어서 말하고 있는 메시지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Ⅱ. 왕위에 오르기까지
광해군은 공빈 김 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세자로 책봉되기까지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병으로 어머니를 여의어 내성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총명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왕으로서의 자질을 키우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배다른 형제가 12명이나 있었고, 위로는 임해군이 있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는 것은 치열한 견제와 암투를 딛고 일어서야만 했는데 다행히 임진왜란으로 인해 그러한 행운의 기회를 잡게 된다. 선조가 북쪽으로 쫓겨가는 몸이고 또한 조정을 분리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해야만 했기 때문에 후사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전란 중에 분조를 이끌면서 왕세자로서 민심을 수습하고, 일본에 항거하기 위해 군사를 모으는 등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한다.
광해군은 과연 연산군과 같은 폭군일까? 1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답은 폭군이었다. 폐모살제 즉 어미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 폭군이 광해군이었다. 물론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폐모살제는 사실이며, 폐륜인 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단지 폐모살제로만 끝나서는 안되며, 지금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부각시키는 역사학자들도 많아졌다.
광해군은 선조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정실 부인 즉 중전의 소생이 아니었다. 더욱이 장남조차 아니었다. 이러한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세자가 되기까지 수많은 일을 겪었다. 또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이 만든 스타이기도 하다. 1592년 4월, 20만 일본군이 부산포 앞바다에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른바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7년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은 전투 초반 한성이 함락되고, 국왕이 의주로 몽진하는 등 패색이 짙었다.
얼마전 <광해>라는 한국영화가 인기를 모았다. 광해군이 자신과 닮은 평민으로 바꿔치기 한후 일어난 일들을 영화로 만든 내용이다. 물론 픽션반, 논픽션 반이며 대부분이 작가의 상상력과 결합된 허구이겠지만, 조선의 왕이었던 광해군의 실제 모습은 어떠한지, 실제로 어떠한 평가를 받았는지 매우 궁금하였던 참에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은 광해군의 외교적 성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영화속의 내용이 아니라, 실제 광해군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반도이기 때문에 대륙과 해양의 중간에 위치해있다. 그래서 수시로 대륙과 해양의 침입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세력들의 위협가운데 조선을 지켜내는것이 당시의 왕의 역할이었다. 광해군은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쳐나갔지만, 역사가들은 왕으로서 제대로 인정을 하지 못하였다. 그럼 광해군은 누구인가? 광해군은 첩의 자식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선조로서 임진왜란당시에 피난갔다가 예상치도 못하게 왕세자가 된 준비되지 못한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