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 책은 현재 우리나라에도 도입돼 점차 확산되고 있는 이 '희망의 수업'의 창시자 얼 쇼리스가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 클레멘트 코스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는 인문학이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무력의 포위망'에서 벗어나 일상을 자율적이고 자신감 있게 새로 시작하도록 이끌어 준다고 말한다. 다시 '인문학이 희망이다'라는 것을 실천적 사례로 보여주는 책.
‘희망의 인문학’은 얼 쇼리스(Earl Shorris)라는 교육학자이자 사회운동가가 빈 민층 학생들에게 철학 수업을 진행하여 변화를 이끌어낸 실화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저자는 가난한 흑인 청소년들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하버드대 학교 출신이라는 배경을 포기하고 직접 뉴욕 빈민가 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 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대부분 마약이나 범죄에 빠져 있었고, 부모님조차 제대 로 보살피지 않는 방치된 상태였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아이들은 자존감이 낮 고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봤다.
이 책은 미국의 저명한 인문학자인 얼 쇼리스(Earl Shorris)가 소외계층을 위해 클레멘트 코스라는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는 여정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언론인, 사회비평가, 대학강사, 소설가, 편집자로서 일을 하였다. 그는 평소에 가난한 이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이들을 위한 배려와 열정, 놀라운 실천의 기록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고대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문답식 수업을 했던 때와 현대를 비교해보면 인간의 본질은 변함이 없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고전을 읽고 토론하면서 인문학이 어떤 것인지를 가난한 이들에게 알려주고 그들이 내면으로부터 서서히 변하게 만들어 준다. 이것이 합법적인 힘을 갖게 해주는 과정인데 얼 쇼리스는 이런 것들은 위험한 것들이지만 그런 종류의 위험은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
450페이지에 달하는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이런 책은 교과서에 실려도 좋을 만큼 좋은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빈곤은 인류역사상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중의 하나이다. 빈곤은 개인과 가족 뿐 아니라 지역사회와 국가 전체에도 막대한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빈곤아동에 대한 복지제도나 정책은 다른 복지제도보다 훨씬 많이 발전했다. 그런데 지금도 수많은 아동들이 빈곤으로 인해 생계의 위험과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빈곤이 아동에게 미치는 가장 의미 있고 광범위한 영향은 경제적 박탈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박탈의 복합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에 있다. 빈곤의 세습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부모의 소득과 자녀의 소득간의 연관성을 보는 게 정확하다. 또한 교육은 부모와 자식의 연계성이 높다. 교육은 곧 소득과 소비를 결정짓는 ‘취업’과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빈곤으로 인한 아동에서의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에서 가난은 대물림 현상으로 고착화될 가능성과 함께 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동의 복지에 있어서도 교육의 중요성과 함께 모든 아동들에게 기회의 평등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인문학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지루한, 어려운 같은 수식어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어쩌다 이런 인식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인문학이 나에게 그리 환영받는 학문은 아니다. 사실 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받아들고는 꽤 난감했다. 인문학이라는 단어만으로 거부감이 들었고 독후감을 써야 한다는 사실에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궁금증이 생겼던 이유는 인문학 앞에 붙여진 희망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대체 인문학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작은 호기심을 안고 표지를 넘겼다.이 책에서 얼 쇼리스는 빈민들은 왜 계속 빈민인가, 왜 가난은 대물림되는가에 대해 이유를 제시했다. 그 이유는 무력이었다. 무력이 빈민들을 포위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무력의 종류로 정부, 이웃들, 소외, 학대와 같은 것들을 들었다.
▛서울역 앞에서 지내던 ‘김씨’는 어는 날 인문학 공부를 해보겠느냐는 희한한 제의를 받고 별 생각 없이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김씨에게 뜻밖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문학 수업에 참여하면서 비롯된 그 내면의 변화는 적어도 김씨 자신에게는 엄청난 혁명이라 할만 했다. 당장 그날부터 지난 1년 반 동안 의지해온 거리 무료 급식을 끊고, 대신 지원센터에서 소개해준 자활 근로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루 몇 천 원하는 쪽방을 얻어 스스로 밥을 지어 먹고 밤에는 불을 밝혀 책을 읽기 시작했다.▟ - `행복한 인문학` 中. 여기서 인용한 행복한 인문학 이라는 책은 한국형 클레멘트코스에 대한 일화로 시작한다.
얼 쇼리스가 1995년 최초로 시도한 클레멘트 코스의 기적이 우리나라에서도 시작되었다. 소외계층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교육의 역할이 빛을 보이게 된 것이다.
# 1. 암흑 - 소외계층과 사회적 약자
흔히 우리는 사회에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계층을 사회적 약자라고 정의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노동자, 여성, 빈민, 장애인을 사회적 약자라고 불렀으나. 요즘은 세분화하여 비정규직노동자, (독거)노인, 미혼모, 성적소수자, 여성가장, 소년소녀가장 등도 사회적약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다른 계층과 유리된 상태로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을 상실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 또한 보호받고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진다. 굳이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도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서 의의와 가치를 지니며 존중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들 중 일을 안 하고 게을러서가 아니라 가난의 대물림으로 인해, 또는 병들고 돌보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소외계층으로 전락한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에는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제 1장, 록펠러보다 더 부유하게, 제 2장 빈곤의 게임: 정의
클레멘 코스는 한 가지 분명한 생각에서 출발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무력과 힘이 결코 동의어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두고 싶은 점은 클레멘트 코스 그 자체가 답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클레멘 코스는 단지 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실마리에 불과할 뿐이다. 클레멘 코스는 서구/유럽 문화권에서뿐만 아니라 마야나 추픽 문화권에서도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실은 그리스의 인문학에서 대안을 모색한 것으로, 싶고 오랜 아테네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개념의 정의가 목적이 아니라는 전제 아래서, 자유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자유에 대해 이미 알려진 일반적인 개념만 가지고 볼 때, 생각 없는 자유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아니면 그런 자유는 단지 혼란에 불과한 것일까? 자유의 형태가 처음으로 확연하게 드러났던 고대 아테네에서는 공적세계에서 인문학을 따로 떼어내는 일이 불가능했다. 인문학과 도시국가는 자신의 존립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했다. 삶에서 인문학을 떼어내는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한참 뒤에 성 바울이 자유의 개념을 관념의 성 안에 가둬버린 뒤부터이다. 철학이 수도원으로 들어가고, 그림이 교회의 실내장식으로 파묻혀버리고 나서야 그 둘의 분리가 가능했다. 고등교육기관이 교육하는 곳에서 준비시키는 곳으로 전략해서 인문학 교육을 완전히 포기하기 이전에도 교육이라는 것,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저 잘사는 사람들의 일일 뿐이었다. 오늘날에서 학교교육은 더 복잡하고, 덜 반복적인 일을 하는 데 적합한 교육과정으로 구성돼 있다.
국가가 어떤 이유에서든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에 관심을 두게 될 때마다 쓰는 방법은 항상 똑같았다. 훈련이 바로 그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지정책의 대부분이 당근과 채찍을 사용해 그들을 훈련시키는 방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복지정책이 이런 식으로 흐르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란 일반인들과는 뭔가 다른 존재, 즉 능력이 부족하거나 별 가치가 없는 사람들, 또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모두 가진 존재라는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레포트를 쓰면서 교수님이 정해주신 책 2권의 제목을 살펴보았다. 희망의 인문학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솔직히 제목을 봐서는 희망의 인문학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가 더욱 더 끌렸다. 왠지 “학”자가 붙으면 내용이 어려울 것 같았고, 요새는 이런 인문학보다는 과학, 수학, 영어가 중요시 되는 시대이고 철학이나 문학은 사치처럼 느껴졌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는 조금 더 추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 상황은 인문학의 위기라 할 정도로 인문학이 많이 외면 받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대한민국 교육과정에는 인문학 교육은 없을뿐더러, 개인적으로 공부할 시간이나 공부를 해야할 필요성조차 못 느끼고 있다. 일류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좋은 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좋은 집을 사기 위해, 정신없이 살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인문학은 나에게 필요없는 것이라고 느꼈지만‘희망의 인문학’의 희망이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와 닿았다. 지금 이렇게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에서 우리에겐 희망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이 책의 1부에서는 가난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에 대하여 책의 대부분을 쓰고 있다. 앞부분에서 가장 가슴에 와 닿은 구절은“캐비어를 먹는 한 사람이 있으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개밥을 먹어야 한다”라는 구절이었다. 정말 이 말은 맞는 말 같았다. 민주주의에서는 잘 사는 사람이 있으면 못사는 사람은 꼭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세상의 절대선이라고 볼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에서도 모두가 똑같이 잘 살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빈곤이란“자신이 스스로 빈곤하다고 밝힌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그들은 절망, 외로움, 격노, 자포자기라는 포위된 심리를 가진다고 한다. 그리고는 결국 생각할 능력을 상실하고, 운명 앞에 굴복을 하고 만다. 그래서 한번 가난에 빠진 사람은 빈곤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이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의지를 심어주는 클레멘트 코스는 공공근로와 같은 사회적 일자리나 빈민을 위한 소액대출 같은 제도처럼 경제적인 측면에서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빈민들이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갖게 해줌으로써 직업 훈련의 효과를 준다. 쉽게 말하면, ‘하루 먹을 물고기’가 아닌 ‘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의식의 혁명이며, 시민으로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의 시작”이다. 이를테면, 시장의 논리와 부자들의 담론을 넘어선,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가장 부드러운 혁명인 것이다.
애벌레가 겪는 이야기를 통해 삶을 묘사한, 짧지만 큰 의미를 담고 있는 책이었다. '보다 충만한 삶', 진정한 '혁명을 위하여'라는 머리말을 읽으면서 무언가 새롭게 느껴졌다. 바로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책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한 줄무늬 애벌레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애벌레는 본능적으로 주위의 잎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자기의 태어난 곳의 잎에서부터 다른 잎, 다른 잎을 옮겨다니며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니만큼 몸도 점점 커져 갔다. 마치 마음도 같이 자란다는 듯이 하루는 생각에 빠졌다.
"삶은 그저 먹는 것일까? 자라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 있을 꺼야."
지금의 삶의 싫증에 못 이겨 자신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 주던 나무에서 내려왔다. 자신이 찾는 그 이상의 것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땅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기만 했다. 풀과 흙, 땅속의 구멍조차도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들도 그에게는 아무런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어쩌다가 자신을 닮은 애벌레들을 만났을 때, 그는 몹시 흥분하곤 했지만, 그들은 줄무늬 애벌레의 '그저 먹기만 하는, 그리고 아직 삶을 깨닫지 못한'옛날 모습이었다.
어느 날, 줄무늬 애벌레는 커다란 기둥을 발견했다. 기둥 근처는 애벌레들로 가득했고, 기둥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애벌레 떼가 기를 쓰고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