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벤야멘타 하인학교』. 귀족 태생의 소년이 ‘가장 작은 존재,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인 양성학교에 스스로 찾아간다는 ‘반反 영웅적’ 이야기로, 성장과 발전으로 대변되는 서양 근대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문제작이다. 꿈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이 무의미한 이야기의 흐름, 깊고 예리한 문장들, ‘부’의 지배에 대한 섬뜩한 통찰 등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이 소설에 뚜렷한 현재성을 부여한다.
일기 형식으로 쓰인 이 소설은 주인공 야콥은 귀족 가문 태생이지만 그의 인생 목표는 하인이 되는 것이다. 세계를 부인하는 공간이며 황량함과 정적이 지배하는 곳인 벤야멘타 하인학교에 입학한다. 근대 교양 이념을 거부하며 아무도 아닌 자로 살아가려하고 흠모했던 여 선생님이 병들어 죽고 급우들도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진 뒤 자아실현을 위해서 유럽을 떠나 원장 선생과 함께 황야로 떠난다.
서구의 근대 담론에 대해 가장 극단적이고 근본적인 성찰을 제기하기했고, 권력’의 구속력, 개인을 집단사고의 노예로 훈련시키는 매스미디어의 횡포, 규격에 맞는 삶 이외의 대안에 인색한 획일주의적 발전논리들에 대한 비판으로서 이소설은 한 세기가 흐른 지금도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새 학교에 입학한 귀족 가문의 소년’이라는 설정이 뿜어내는 어떤 이미지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주인공인 ‘소년’이 아슬아슬한 모험을 거쳐 학교의 비밀을 밝혀낸다거나, 귄위적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한 꿈을 찾는다거나, 혹은 우정과 사랑의 힘을 경험하며 사교계의 어른이 되어간다는 줄거리는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줄줄이 떠오른다. 나 역시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처음 펼치던 순간에는 비슷한 내용을 상상했었다. 거만한 귀족 자제인 주인공이 하인학교의 생활을 경험하며 성숙해지는 성장 소설이 아닐까 지레짐작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설은 내가 예상한 과녁의 정반대 방향에 꽂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