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보편적 차원으로 확장해나가는 독보적인 글쓰기와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 개정판이 1984Books에서 출간되었다.
아버지의 삶을 회고하며 그의 말과 제스처, 취향,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사건들, 자신과 함께 나눴던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을 사실을 바탕으로 '필요한 단어'만을 사용해 옮겨 적은 이 작품은, '어떤 현대 문학과도 닮지 않은 압도적인 걸작'이라는 평과 함께 1984년 르노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설은 중등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정확히 두 달 후에 있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비명도 오열도 없이 진행되었던, '고상한 세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덤덤하게 흘러가는 장례식과 사망 이후의 형식적이고 통상적인 절차들을 끝내고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작가에게 찾아온다.
'시처럼 쓴 추억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는 단조로운 방식으로, 현실이 스스로 제 모습을 투명하게 드러내도록 쓰인 이 소설은 쓰지 않으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어느 불투명한 삶을 구하는 한편, 그 과정에서 벌어진 나와 아버지와의 거리, 계층간의 거리 역시 드러낸다. 언제나 '두 강 사이를 건너'게 해준 '뱃사공'이자, 자신을 멸시하는 세상에 자식이 속해 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자부심, 심지어 존재의 이유였던 '한 아버지, 한 남자의 자리'는 다시 한번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우리 옆의 '자리'를 돌아보게 할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글을 썼다. 이 글은 수필 같기도 하고 한 사람의 전기이기도 했으며,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둔 소설 같기도 했다. 그녀의 문학에 공통점이 있다면 최대한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목격자처럼 진술한다는 점이다. 그 대상이 부모님일 때도 그녀의 글은 변함없었다.
‘남자의 자리’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아버지의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본인이 듣고 보고 아는 내용을 썼다. 이 책 제목이 ‘남자의 자리’인 것은 아버지가 아닌 남자라는 단어를 통해 작가가 대상과 감정적 거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자리’라는 단어가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궁금했는데 이 책에서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는 자신의 자리를 찾고, 또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독서모임에 채택되어 어쩌면 생에 연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었다. 모임에서는 보물 같은 작가를 발견했다는 다른 참석자의 말에 딱히 동의하지도, 다른 작품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곱씹어 볼수록 매력적인 작가와 작품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순차적으로 읽는 날이 올 거란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은 아니 에르노여서거나 <남자의 자리>여서가 아니라 독서모임의 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