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고전을 보는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는『오래된 책방』시리즈 제11권. 한국사의 판도를 만주 일대로 확장한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의 저서 <발해고>를 우리말로 옮긴 책이다. 고서간행위원회의 <발해고>를 대본으로 번역하였으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대조하였다. 유득공은 한국,...
대를 지나며,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 자주 고민했다. 나는 내가 잘 하는 것과 잘하고 싶은 것 사이를 끊임없이 저울질했다. 나는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다. 끼적이듯 한 몇 개의 습작과 몇 번의 당선,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낙선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내게는 문학적 재능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 수사(修辭)는 가난했고, 서사는 앙상했다. 나는 내가 쓸 수 없는 문장을 마음에서 지워나갔고, 내게는 육하(六何)가 남았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던 것 같다. 입대 후에도 틈틈이 신문을 읽고, 책을 보고, 글을 썼다. 내 독서와 작문은 주로 사회과학의 변두리나 역사학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넘어야 할 학문의 벽은 높아보였고, 종종 글을 쓸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중 유득공이 쓴 『발해고』를 읽었고, 나는 조금 기운을 냈다. 이 독후감은 내가 느낀 작은 희망의 기록이다.
유득공은 신라의 통일을 강조하여 한국사의 판도를 한반도로 위축시킨 종래의 역사 인식을 바꾸어,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를 발해의 영역이었던 만주 일대로 확대시켰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여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2000년의 역사를 왜곡하려고 하고 발해를 일개 당나라의 지방봉권정권으로 치부할려고 했다는 점에서 보면 발해고는 뛰어난 역사기록서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유득공의 사유체계, 생애는 어땠기에 발해고를 써낼 수 있었을까
유득공이 살아있었을 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당나라, 청나라의 영향(중국 세계관)을 많이 받아서 인지는 몰라도 남방중심의 역사인식이 많았다.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사 능력검정시험 3급을 대비하면서였다. 유득공의 <발해고>는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저술된 가장 대표적인 역사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저자의 생애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면, 그는 서얼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으므로 서얼의 신분을 타고났다. 그래서 과거응시에 제한이 있었으나 정조 즉위 후인 32세에 검서관으로 임명돼 본격적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한다.
이 책은 유득공이 원래 역사가가 아닌 문학가였다는 점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다른 북학파들처럼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선 모든 문학작품을 섭렵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 과정에서 우리 역사와 관련된 사료에도 주목하게 됐다. 그의 저서들에 중국의 서적들이 다양하게 인용돼있는 것도 이 때문인데, 이 과정에서 우리역사와 관련된 새로운 자료들을 자주 찾아낸 것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중국이외에도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발해고>를 저술하면서 <속일본기> 등의 일본 사료를 인용한 것이 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발해는 누구의 역사인가>
한국 사람들에게 발해, 고구려는 누구의 역사인지 묻는다면, 100명중 90명은 자랑스러운 한반도의 역사라 할 것이다. 그러나 왜 한반도의 역사인지 물어본다면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중국은 몇 년 전부터 발해, 고구려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동북공정이 바로 그 작업 중 하나인데, 동북공정은 중국이 국책사업으로 추진하는 만큼 물적, 인적 지원을 받으며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다. 그동안 발해,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분분했으나 국가적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을 통해 발해,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단정, 공식적인 견해로 확정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한국이 동북공정에 대해 이렇다 할 대응을 못하고 있다는 점이고, 국민들 역시 심각성을 느끼기는커녕 발해, 고구려의 역사에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 된다면 가까운 미래에 발해,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본 것 (What I See) ▶ 책의 핵심내용
p 18. 그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그의 역사 인식은 문화론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북학과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서는 고금과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문학 작품들을 설립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그런 가운데 우리 역사와 관련된 자료에도 주목하게 되었다. 그의 저서들에 중국의 서적들이 다양하게 인용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p 27. 이 책에는 모두 22종의 책이 인용되었다. 이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일본의 역사서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서구가 일본인들의 시를 모아서 엮은 ‘일동시선’에 시무을 썼고……...
일본 자료를 토대로 ‘국서고’라는 독립된 항목을 설정할 정도로 자료 이용의 범위가 확대된 사실도 역시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p 29. 유득공은 서얼로 태어났고 부친마저 일찍 돌아갔기 때문에 신분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Ⅰ 유득공과 발해고
1. 생애
유득공은 부친 유춘이 결혼 8년만인 1748년 11월 5일에 낳은 아들이다. 이 때 유득공의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그는 서얼 신분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그의 생애는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성장기는 그가 태어나서부터 20세 전후까지를 이른다. 그의 부친이 5세 때에 세상을 뜨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글공부를 하였다.
20세 이후 북학파 인사들과의 교유기에 접어드는데 이 당시에 그는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등과 서로 교유하였다, 유득공이 2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는데 이를 전후하여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게 되면서 암울한 심정을 노래하였다. 이 시기에 정리된 문집이 『가상루집』 이다.
유득공이 32세, 영조가 승하한 후 정조가 즉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게 되는데 정조는 유득공을 규장각 검서관에 임명하게 된다, 이후 그의 시들은 암울했던 지난날과 달리 밝아지면서 삶에 날개를 달게 된다.
그러나 유득공을 아끼던 정조가 돌아가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유득공의 모친이 사망한 후로는 그의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2. 역사 인식과 저술
유득공은 문헌을 두루 섭렵하고 글자의 속성과 소리에 관심을 기울인 점 때문에 우리 역사와 관련된 새로운 자료들을 자주 찾아내곤 했다. 또한 유득공은 중국과 조선 외에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그의 세계관이 넓어짐에 따라 중국 일변도의 관념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발해고』에서 일본 사료까지 인용할 수 있었다.
유득공의 사료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던 종래의 견해들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러 사서들을 검토하지 않아서 3한 이전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된 것은 탄식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금석문에도 관심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