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빈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당대의 과학적 이해와 철학적 사유를 아우르려 했던 거대한 도전이었으며, 생명이라는 복잡하고 모호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집념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생물학과 물리학을 넘나드는 시도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가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던진 질문은 “생명체가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고, 환경 속에서 어떻게 질서를 생성할 수 있는가?”였고, 이로써 물리학의 언어로 생명을 해석하려는 고독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유기체가 엔트로피를 떨어뜨리는 작용, 그게 체내에서 모든 분자가 무질서해지는 것도 아니고 엔트로피로 설명을 하려는 시도는 적절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이것은 철저히 원자 개념에서 도입해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유전자를 원자적 접근으로 해석한 부분 자체는 신선했다.
방사성 물질이 DNA의 손상을 입히는 점, 활성화에너지라고 봐도 될 문턱값을 제대로 넘지 못하게 방해를 해서 돌연변이가 발생한다고 본 물리학적 해석은 굉장히 돋보였다. 이런 유전자 외부의 공격에 대해서 충분히 방어하고 유전이 그대로 잘 될 수 있는 건 독자적 안정 시스템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담하는데 물리학자든 화학자든 생물학자든 이 책의 내용을 전부 이해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나 같은 일반인은 더 못 알아들을 이야기를 많이 했다. 생물이 행동하는 부분과 정보를 모으고 변화를 알아낸다, 이건 적응 관련해서 해석해야 할지 표현이 매우 아리까리한 부분이 있다.
슈뢰딩거는 유전자에 대해서 당시 과학으로 알아낸 오류가 잘 발생하지 않는 원인을 파악하고 설명하려고 했다. 유전자는 원자가 모여서 분자 상태로 존재를 한다. 유전자가 여러 개 활동하는 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아무튼 분자 숫자가 많아져야만 그것을 통계로서 확인할 수가 있다고 한다.
저자가 아마 생명체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당시에 하지 못했기 때문에 과감한 주장이 가능했다고 본다. 가장 난해한 주장은 바로 생명체 내에서 엔트로피가 더 줄어드는 이른바 음의 엔트로피라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예외적으로 생명체 내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저자의 예측이 맞았던 건 양자역학 기반으로 대개 불규칙, 통계적, 비주기 이런 것이었는데 나중에 이 책이 발간되고 한참 뒤에 왓슨, 크릭이 DNA구조, 유전물질의 구조를 밝혀냄으로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놀라운 예측이다.
이 책은 전문성이 높다. 그도 그럴 것이 천재 물리학자가 썼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다 밝혀진 생명과학에 대한 진실을 물리학의 시점에서 보고 해석하고 예견까지 내놓은 것인데 사실 학제간 교류, 학제간 연구가 활발한 요즘 연구자들이 보면 도움이 될 만하지 일반 사람이 읽기에는 교양에도 큰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슈뢰딩거의 예측이 틀린 거 같기도 하다. 그 당시 아직 DNA도 명확히 존재가 밝혀지지 않았고 유전이 양자역학처럼 불규칙적인 확률로 인해 결정된다는 예측을 했다. 이것은 조금 아니지 않나 싶다. 생물 유전 메커니즘은 분명히 염색체 분리라는 과학적 메커니즘에 의해 결정된다.
제목 옆에 물리학자가 본 생명현상인데 이게 뭔가 싶다. 물리는 물리이고 생물은 생물인데 생물에 어떤 물리적인 것이 녹아있길래 이러나 싶었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이름은 들어봤다. 이름이 독특해서 과학자인 건 알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쓸 때는 DNA고 뭐고 발견이 안 되었던 것 같다.
엔트로피, 엔탈피는 뭔지 읽어도 잘 모르겠다. 물리학이 주기성을 갖는 반면 세포 내에서는 주기성이 아닌 불규칙성이 더 많다고 지적한 점은 웃기다. 양자역학이 전자가 이중성을 갖는다는 거나 또한 정확히 운동량과 변위를 동시에 측정 불가능하다는 점은 싹 가려놓고 하는 말이다.
이 책은 슈뢰딩거의 고양이, 슈뢰딩거 방정식 등으로 유명한 양자역학을 연구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썼다. 당시 과학이 폭발처럼 발전하던 시대에 정력적으로 활동한 물리학자로 알고 있는데 생명에 관한 자신의 논리, 주장을 많이 펼쳤다. 현대 관점으로 맞는 해석도 꽤 있었다.
저자는 세포 내에 작은 물질이 열로부터 영향을 적게 받는 것은 어떤 법칙에 따른 것일텐데 그것이 양자역학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내가 알기로 양자역학은 소립자를 다루는 학문이다. 소립자란 전자, 양성자, 이런 것이다. 그런데 염색체, DNA는 고분자이다. 굉장히 큰 물질이다.
양자역학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해석은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틀렸다고 생각한다. 물론 생물리학이라는 학문이 있기 때문에 생물체 내 분자, 입자가 받는 물리학적인 영향, 메커니즘은 따로 있긴 할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슈뢰딩거는 생명이 무엇인지 딱 잘라 말하지 못했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물리학의 대가 중 한 명인 에르빈 슈뢰딩거가 쓴 책이다. 생명에 대한 경외, 이 때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은 생명과학에 대한 의문이 쭉 쓰여져 있었다. 슈뢰딩거는 생체 내에서 물리적, 화학적 작용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던졌다. 상당히 재미있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알려진 바로는 자연은 물리, 화학 이런걸 나누지 않는다. 한 마디로 종합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물리, 화학으로 나누어서 보는 것이다. 이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도 했던 말이었다. 생체 내의 메커니즘, 어떤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놀랍지는 않다.
이 책의 저자는 유명하디 유명한 슈뢰딩거이다. 슈뢰딩거가 이 책을 썼을 때는 양자역학이 태동하고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한 시기였을텐데 생명에 대한 지식이랄까 발전은 더뎠던 것으로 예상한다. 슈뢰딩거가 당대의 학자였음에도 되게 이상한 얘기를 많이 썼기 때문이다. 생명체, 개체가 큰 이유를 묻는 것은 어리석다.
양자역학을 다룬 대가라면 입자, 전자, 원자 단위를 다룬 석학인데 우리 인간이 생명체가 그토록 큰 이유를 굳이 물은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답은 없겠지만 그냥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이라고 결론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양자역학 관점에서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생명체가 비규칙적이라는 건 말이 되질 않는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저 살아있는 무언가라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가? 나도 그렇다. 그런데 물리학자는 생명을 어떻게 바라볼까. 물리학자가 생명에 대해서 논해도 되는 것일까? 나는 물리학자가 생명을 어떻게 바라볼 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물리학자가 생명에 대해서 논하지 말란 법은 없다. 모든 학문은 연결되어 있기에 어느 학문이든, 어느 사람이든 그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다만, 좀 더 고차원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격차는 분명하기에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물리학자는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