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다시 읽고 싶은 명작' 시리즈, 제1권 『천국의 열쇠』. 미국에서 1947년 처음으로 출간된 후, 10여 년간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를 지킬 정도로 재미있고 흥미로운 소설이다. 이 소설은 불우한 소년기를 보낸데다가 실연의 아픔을 지닌 어느 남자가 신부가 된 후, 이상주의와 자유주의적 태도로 갈등을 겪다가...
1938년 9월의 어느날 오후, 프랜치스 치셤 신부는 성 콜롬비아 성당에서 나와 언덕 위에 있는 사제관으로 통하는 가파른 언덕길을 힘겹게 다리를 절며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무심코 현관 쪽을 바라보니 자동차 한 대 서 있었다. 그 차의 주인은 주교의 비서인 스리스 신부이었다. 그는 조사를 한 다음에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다. 하지만 스리스 신부는 치셤 신부의 한적한 생활에 위협을 가한다. 그리고 이런 연유로 그의 추억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의 제목 ‘천국의 열쇠’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보다는 천국의 열쇠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일지를 생각해보게 만들어주었다. 책을 읽으며 마음에 와 닿았던 문장이 있다. “천국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천국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어디 있어도 좋은 것입니다.” 이 문장처럼 우리는 살아가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 하고, 각자가 위치한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삶의 목표를 세우고 그것들을 하나씩 실천해 나가기 위한 원동력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나의 관점에서, 나의 시각에서 내 입장만 생각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사정과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그 원동력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세운 목표가 사소한 것일지라도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공인이 아니더라도, 혹여 어떤 단체나 모임의 리더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의식하며 살아간다. 적어도 지금껏 살아온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 나는 분명히 그렇다. 그 대상이 절대자, 하나님이실 때도 있지만 사람일 때가 훨씬 더 많음을 인정한다.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는 그에게서 오늘, 그리고 여기 살아가는 나에게 그의 삶은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실감나게 다가왔다. 깊은 절망과 좌절, 극심한 고통과 심적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과 그가 대하는 사람들에게 진심과 성실로 살아가려는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본받을만한 삶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문득 “삶으로 가르친 것만 남는다”는 혹자의 저서명이 떠올랐다.
특별히 선교의 관점에서 글을 읽어가면서 여러 가지 주제들을 새롭게 마주할 수 있었고, ‘선교’라는 범주가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크로닌은 1896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엄격한 아일랜드의 구교 출신이며, 어머니는 개신교 스코틀랜드인이었다. 크로닌은 카톨릭 영세를 받고 비교적 평화롭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일곱 살 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뜨자 그 후부터는 외가로 옮겨 살게 되었다. 종교적 편견이 심했던 당시의 분위기로 인해 개신교의 아이들로부터 많은 학대를 받았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후에 크로닌은 자신의 작품에서 종교적 편협성을 극복하고자 추구했던 노력의 씨앗이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주옥같은 작품을 여럿 남긴 크로닌은 대학을 진학할 때 문학과는 사뭇 동떨어진 엉뚱한 길을 선택했다.
그는 덤버튼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의학을 공부하면서 해부학 연구와 과학적 훈련으로 표면적으로는 기독교를 버린 일이 없었으나 사실은 내면적으로 크로닌은 이미 종교와 결별한 상태였던 것이었다. 이러한 대학전공을 살려 크로닌은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해군에 지원하여 군의관으로 근무했다. 크로닌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직후에는 남웨일스의 탄광촌에서 의사로 근무하면서 무지와 가난에 허덕이는 광부들에게 인도주의에 가득 찬 봉사를 하였다.
그 후 의사로서 여러 곳으로 근무지를 옮기면서도 연구에 몰두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영국 내과의사회의 회원이 되었다.
남웨일스 광산에서의 생활은 크로닌에게 의사로서의 본격적인 경험과 함께 그의 신앙심 형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포르말린으로 소독이 된 인간의 신체를 해부하며 인간 역시 하나의 정교하고 복잡한 기계 이상의 것으로 느끼고 생각했던 냉소적인 의학도 였던 크로닌은, 남웨일스에서 독특하고 다양한 인간들과 접하면서 새로운 정신세계를 경험했다. 그것은 스스로의 우월감에서 벗어나는 길이었으며, 그 길은 바로 신을 발견하는 가장 쉬운 길이었다. 학습이나 설교를 통해서가 아닌, 인간과 생활자체와의 만남 속에서 체험적으로 크로닌의 신앙은 이후 그의 모든 작품 속에서 주요배경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주인공 프랜치스 치셤이 태어난 곳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두 종교를 믿는 사람들간의 반목이 심한 곳이다. 치셤은 어린 시절, 이 종교에 관한 다툼으로 인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된다. 그리고 치셤의 부모님의 유산을 탐한 친척 집에서 살게 된다. 하지만 그 곳에서 치셤은 학대를 받게 되고 이를 알게 된 부모님 생전부터 치셤을 아껴주던 또 다른 친척인 폴리 아주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는 신학교에 가게 된다. 물론 치셤도 좋아하던 ‘노라’라는 여자아이가 있었지만(편지도 많이 보냈었지만 답장은 없었다), 훗날 그가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뿐이었다. 이 일로 치셤은 신부가 되겠다는 그 결심을 더 굳힌다.
-사고 소식은 네드가에 먼저 알려졌다. 폴리는 정신을 잃고 마차에 실려갔다. 온 읍내는 순식간에 충격적인 사고의 소문으로 술렁거렸다. 결혼식을 하루 앞둔 노라가 폴리의 눈을 피해 달리고 있던 기차에서 떨어져 자살을 했다는 이 엄청난 비보는 이 집안을 무서운 암흑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날 밤 늦게 프랜치스는 자기 자신도 의식을 하지 못한 채 성 도미니코 성당으로 갔다. 성당은 텅 비어 있었는데 감실 앞 빨간 성체불이 흔들리는 것만 의식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진정으로 하느님께 매달렸다. 험악한 운명이 무자비한 그물을 쳐 자기를 꼼짝 못하게 얽어 놓고 있는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그는 몸무림쳤다.
굳게 닫힌 입술은 어떤 기도문도 외울 수 없었고 그는 원망과 회한 속에서 자신이 버림받았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마음 속에 한줄기 빛이 비쳤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마음 속에서 한줄기 빛이 비쳤다. 그것은 고통으로 몸과 마음을 희생하여 이미 자신에게 주어긴 길인 하느님을 따르라는 성약임을 그는 가슴 속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 산모랄레스의 맥납 신부님께 되돌아가야 한다.
오래 전에 크로닌의 <성채>를 대했을 때 너무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천국의 열쇠>를 읽곤 ‘이 사람 소설들은 분위기가 비슷하군’ 하면서 약간 심드렁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이 작품을 다시 읽으니 나이를 먹어서인지 가톨릭 신자가 되어서인지 이해나 감동이 예전과는 또 달랐다.
주인공 치셤 신부는 초라한 외모와 서투른 처세술과 때로는 불안하거나 방황하고 갈등하는 인간적 약점을 지녔지만 그에게 닥치는 많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신앙의 길을 걸음에 있어서는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에 구애됨 없이 우직하게 그의 길을 간다.
크로닌은 이 소설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잘못 빠지기 쉬운 여러 왜곡된 인간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어떤 이는 돈이나 명예만 쫓고 어떤 이는 편협함으로 인하여 이해를 거부하는 배타성을 지녔다. 그 중에서도 치셤 신부의 신념은 언제나 진리를 향하고 있어 고난이나 비난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다.
티베트 속담에는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라는 매우 우스운 말이 있다. 처음 들을 때는 웃기지만 두세 번 곱씹어 생각해보면 상당히 그럴듯한 말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걱정과 내적 갈등을 겪으며 살아가게 된다. 이 책의 주인공인 프랜치스 치셤 신부님 또한 그렇다.
그는 연약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걱정하고 갈등하지만 깊은 신앙을 통해 청빈과 구도의 삶을 살아가는 신부님이다.
<중 략>
나 또한 교회를 다니는데 남들이 보기에 밀리 신부와 같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개신교 목사님을 만난 치셤 신부님은 그와 깊은 교감을 나누고, 그들은 서로를 도우며 살게 된다. 중국 군벌 잔당들에게 잡혀 고문당하고 심지어 목사님은 죽게 된다. 그 힘든 과정을 겪고 본국으로 돌아간 치셤 신부님은 그 곳에서 작은 성당에 자리 잡고 종교적 편견 없이 유교 사상을 비롯한 여러 가지 훌륭한 가르침을 주며 살았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