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풍성하고 다양한 시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는 점도 『시의 이해』의 장점이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시인으로부터 현재 활동하는 시인에 이르기까지, 국내외를 막론하고 탁월한 작품들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이 시를 감상하고 향유하는 폭을 크게 확장시켜 준다.
또한 『시의 이해』는 인문 교양서이기도 하다. 이...
‘아이러니’의 어원은 그리스어 ‘에이로네이아’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아이러니는 고대 그리스 희곡의 인물 유형인 ‘에이론’, ‘알라존’과 관련이 있는데 에이론이 무지하고 약한 척한다는 점에서 ‘사실과 다르게 속인다’는 뜻과, 에이론이 알라존을 이긴다는 점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독자의 기대와 예상을 뒤집는다’는 뜻을 갖게 되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 또한 각계의 권위자들에게 산파술로 사람들을 속이고 다닌다며 에이론 취급을 당했다.
다른 것을 ‘대신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상징은 대신하는 의미의 수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기호론적 상징은 의미하는 바가 한 가지로, 상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두 공통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상징은 의사소통이 목적인 기호다. 한편 문학적인 상징은 의미하는 바가 여러 가지다. 보조관념이 여러 원관념을 나타내도록 표현되는 상징이다. 보조관념만으로 원관념을 의미할 수 있다는 건 기호론적 상징과 유사하지만, 인접한 추상적인 개념들까지 포함한다는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은유는 유사성에 따라 유형을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 유사성이 큰 경우다. 이때는 두 대상의 차이점이 은유를 참신하게 한다. 단 유사성이 지나치게 크면 같은 말의 되풀이처럼 느껴질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이질성이 클 때이다. 무관해 보이는 두 대상 사이의 은유는 독자에게 깊은 생각을 요구한다. 때문에 난해하고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은유와 직유의 차이는 무엇일까.
인간은 사유함으로써 ‘이미지’를 만든다. 이는 인간의 고유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미지란 어떤 대상을 정신 속에 재생시키도록 감각적으로 자극하는 것이자, 지적 정서적 복합체로서, 대상에 대한 특정한 느낌과 생각이 현현된 것이다. 또한 추상과 구상이 결합체면서 추상적인 의미를 감각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황인숙의 「흰눈 내리는 밤」을 읽어보자. 시인은 흰 눈이 내리는 숲의 이미지를 독자에게 제시한다.
운(韻)이란 소리의 울림을 뜻하며, 소리를 반복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음악성을 만들어내는 시작법을 압운법이라고 한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술노래」의 원문을 읽어보자. 시의 각 행의 마지막에는 같은 소리가 번갈아 반복된다. 이처럼 단어가 문장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여 활용되는 언어를 굴절어라고 하는데, 이러한 굴절어는 압운법에 있어 각운 사용에 유리하다고 여겨진다. 또한 중국어의 경우 고립어임에도 불구하고 시에서 자유로이 압운과 각운을 구사한다. 이에 비해 한국어는 교착어(부착어, 첨가어)다. 문장이나 어절 끝음절의 음상이 빈약하여, 한국시는 운이 발달하지 못했다고 취급받아왔다.
시의 언어를 사용하고 드러내는 방식은 다양하다. 박목월의 「청노루」에서처럼 파격적인 생략과 문법 파괴를 통한 시적 허용으로도, 고전적인 어구의 사용 등에 기반한 시어법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물론 윌리엄 워즈워스처럼 이러한 시어법을 비판하고 일상의 언어를 시 속으로 들여오자는 사람들도 있다. 황동규는 「즐거운 편지」는 일상어를 아름답게 재탄생시킨 좋은 예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불고,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는 일상적인 변화는 이 시를 통해 사랑과 그리움의 과정으로 전환되었다. 사소하게 취급되는 요소가 시적 맥락을 부여받아 서정적으로 아름다워진 것이다. 영국의 비평가 I. A. 리차즈 역시 일상어와 시어의 구분을 경계했다.
신비평은 작품 고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서는 작품 자체를 분석해야 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전기나 역사에 기반해 시를 해석할 때, 작품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분석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인을 시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 관련된 작업으로는 시적 화자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과, 시를 시인의 정서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있다.
이때 시적 화자는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이다. 시적 화자의 개념은 시에서 말하는 사람은 곧 시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장치다.
플라톤에게 영감이란 신적인 힘이었다. 그래서 시인의 활동 역시 접신에 근거해 있어, 시인은 자신의 행동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시인은 결국 점쟁이에 불과해서 철학자에 비해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반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영감을 중요하게 여겼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는 영감을 주는 예술의 여신 ‘무사’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 낭만주의자들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 먼 곳의 것을 동경했다.
시는 무엇을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의 카타르시스를 긍정하며, 시가 독자로 하여금 위험한 감정을 잘 다룰 수 있게 해준다고 보았다. 반면 플라톤은 시에 대해 효용론적 관점을 바탕으로 부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에 따르면 시는 자극적이어서 비이성적인 충동을 촉발한다. 그래서 배척해야 하고 검열해야 하는 분야기도 하다. 이러한 시인 추방론에 대한 반박은 미국의 평론가 E. 윌슨의, 희곡 「필록테테스」 해석에서 살펴볼 수 있다. 주인공 필록테테스는 발이 다쳐 동료 병사들에게 버려지지만, 활을 만들 것을 부탁받으며 전장으로 복귀한다.
예술은 어떤 의도로 창작될까. 감상자가 이를 파악하려면 예술작품을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이를 위해 예술가는 ‘생소화 효과’ 를 의도할 수 있다. 생소화를 겪는 감상자는 예술작품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지켜 작품과 현실을 분리하게 된다. 그 현실은 세상에 없는 유토피아일 수도, 이데아일 수도, 현실일 수도 있다. 플라톤의 『국가』에 의하면 예술이란 이데아의 모방이다. 따라서 시인들은 플라톤의 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반면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술가는 현실을 모방함으로써 보편성을 지향하고 이데아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를 개연성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