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형제복지원 사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폭력과 인권유린. 1987년 폐쇄될 때까지 12년간 복지원 자체 기록으로만 513명이 사망하였고, 다수의 시체가 의대에 팔려나가 시신조차 찾지 못한 사건. 가히 한국판 아우슈비츠라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과 87년 민주화 투쟁의 열기 속에 묻혀...
나이 많은 어른들이 술자리에서 가끔 하는 농담 섞인 말이 있다. 그들이 보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저거 삼청교육대에 보내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하는데’라고 말을 하는 식이다. 내가 나이를 먹고 삼청교육대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면서 나는 항상 삼청교육대, 그러니까 국가에 의한 폭력이 저런 식으로 희화화 되는 게 과연 맞는 일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살아남은 아이’는 80년대 부산에서 있었던 이른바 ‘형제복지원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다. 형제복지원은 1975년 세워진 부랑인 수용시설인데,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이곳에서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인, 고아 등을 불법감금하고 강제노역은 물론 구타 등 끔찍한 학대와 암매장을 하는 일이 벌어져서 밝혀진 사망자만 551명에 달한 일이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그러다 1987년 3월 탈출을 시도한 원생 1명이 직원의 구타로 사망하고, 35명이 집단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형제복지원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 서론
‘살아남은 아이’를 처음 잡은 시기는 3월 중순이었다. 나중에 시간에 쫒기 듯 허겁지겁 읽기보다는 책 사이에 천천히 많은 생각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이 책 한 장 한 장이 내 손가락에 전달한 비극의 무게는 너무 단단해서 나중에는 감히 내가 어떤 생각을 남기겠다는 말조차 죄책감이 들었다.
한종선 씨가 이 책의 1/4정도를 할애하여 글과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는 복지원의 모습은 상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역겨웠다.’ 그것이 그 복지원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는 말일지라도 그건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피 튀기는 공포영화는 재미있게 보면서도 이 책 속의 장면에는 쉽게 몰입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실제로 이런 일이 정말 벌어졌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을 모든 사람들에게 외롭게 외면당하며 방치되었다는 그대로의 사실이 너무 절망스러워서가 아닐까?
한종선 씨가 묘사한 장면들을 보고 있자면 사드의 소설인 ‘소돔 120일’이 생각난다. 호기심에 펼치게 된 그 책을 본인은 도저히 끝까지 지켜볼 수가 없어서 덮어버렸지만 그 때 들었던 거부감과 혐오감, 그리고 절망감을 한종선씨의 이야기에서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내용 자체의 잔인함과 강도는 사드의 소설이 더 크지만 이 책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 나에게는 더 숨 막히게 다가 왔다. 사실 사드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냥 지나치기 위한 말이 아니다. 사드에 대한 연구는 철학적, 문학적으로는 많이 이루어졌지만 정치적인 부분에서는 그렇게 주목을 받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삶과 작품에서 생명정치의 맥락을 강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일생의 상당 부분을 감옥과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려낸 작품 속 인간의 생명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극한으로 내몰리게 된다. 지금부터 하려는 논의도 바로 복지원을 둘러싼 복잡한 생명정치의 이야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