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자아의 상실과 불안, 도피의 메커니즘과 함께 그 회복의 길을 제시하다!자유의 심리학적 측면을 분석하다『자유로부터의 도피』. 《소유냐, 존재냐》,《사랑의 기술》 등을 통해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의《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번역가 김석희를 만나 더 정확하고...
- 자유 앞에서 흔들리는 나에게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자유에 대한 인간의 내면을 예리하게 통찰한 책이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단순히 전체주의와 같은 사회 현상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고 생각했지만, 읽는 내내 놀랐다. 프롬이 말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단지 과거의 역사나 정치 체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취업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불안에 흔들리는 나의 모습과 정확히 겹쳐졌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끝없이 쏟아지는 채용 공고 속에서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곳은 점점 줄어들고, 합격보다는 불합격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지는 날들이 이어진다.
제목이 바로 보면 이해가 안 된다. 누구나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아 자체가 불안해짐으로써 자유에서 벗어나려고 한다고 했다. 즉,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었다. 이해가 된다. 불안하니까 남이 정해준 레일을 지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살곤 한다.
저자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이 기본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남에게 종속되어야만 한다. 그것을 소속이라고도 했다. 매우 신선한 시각은 우리 자아가 불안할 때 그것을 온존하기 위해서 남이나 다른 물건, 그런 것에 의존을 하기 마련이라고 한 점이다. 이런 시각은 처음 접하게 되었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단순한 책 제목을 넘어 현대 사회의 본질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문구다. 1941년 출간된 이 책은 자유를 얻은 인간이 역설적으로 경험하는 불안과 소외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저자 프롬은 자유를 단순히 외부로부터의 강압이나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로 정의하지 않는다. 그는 자유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정의한다. 첫째, 부정적 자유는 외부로부터의 강압이나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의미한다. 둘째, 긍정적 자유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인간 본성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프롬은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부정적 자유는 얻었지만, 긍정적 자유는 아직 얻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프롬은 인간이 불안과 소외를 극복하고 긍정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현대 사회의 불안과 자유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중요한 책이라는 생각이다. 이 책은 인간이 불안과 소외를 극복하고 긍정적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며, 인간 사회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에리히 프롬의 저서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이해와 그것이 가져오는 불안감, 그리고 이로 인한 도피 현상들을 분석하는 책입니다. 이 작품을 읽고나서,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깊이 있게 탐구하려는 작가의 노력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 책에서 인간이 자유를 추구하는 동시에 그것으로 인한 불안감을 견디기 어려운 존재임을 지적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는 동물이 인간 말고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지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목숨 걸만한 흥미가 떨어진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흥미가 생기는 모양이다. 그가 제시하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차이 그리고 칼뱅과 루터의 교리가 나오게 된 경위 등을 설명할 때 꽤나 진중했다. 빗나간 화살 따위는 시체에 불과했고 정확한 단어를 설명하기에 적당한 구실을 대고만 있지만 프로이트가 주장한 무의식 체계에서 특정한 개인을 부정하는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생각의 전환을 이룩했던 학자가 주축이 돼 본 적이 있나 싶지만 간편한 식사를 때울 만한 개념이 궁했다.
언제나 날씨를 보면 지난 일들을 겪어봐야겠지만 대대적으로 불편한 태도에 지쳐갈 때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벌써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고 두 개의 상반된 대구가 교차되어 퍼져나가기에 이른 아침부터 책을 읽는다. 참 잘 쓴 글이라고 칭송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인류는 항상 ‘자유’를 갈망해왔다. 그러나 자유를 갈망하는 한편 자유로부터 도피하였다. 수없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일궈낸 자유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불안정함,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고 구속 속으로 되돌아가려는 실수를 반복하였다. 이 책에서는 종교개혁,프랑스 대혁명 이후 또다시 왜 전체주의에 열광한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는지, 파시즘의 심리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사회에 대한 통찰이 제시되어 있다. 프랑스 대혁명, 종교 개혁 이후 왕과 신으로부터의 구속이 사라졌다. 부르주아들은 상공업으로 큰 돈을 벌었고 자유를 쟁취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계층에 상관없이 투표권이 주어졌으며 더 이상 군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
독후감을 위해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세 가지 요소로 인해 당혹스러웠다.
우선 책 제목.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접했을 때 당황했다. 내가 알고 있는 자유의 이미지는 긍정적이고 모두가 지향하는 가치에 가까웠다. 그런데 왜 책의 제목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일까. 사전에 자유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명시되어 있다. 철학 용어로서의 자유는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일’이다.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든 이것으로부터 도피해야 할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책의 표지 그림 또한 나의 혼란을 가증시켰다. 그림은 ‘Escape From Freedom’이라는 문구가 마리오네트처럼 손가락에 매달려 있다. 이는 구속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책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자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도 하나의 구속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건지, 자유에서 벗어난 곳이 구속인 건지 표지 그림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를 당황시켰던 건 다름 아닌 책의 저자였다. 내가 알고 있는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 저자이다.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과목에서 성과 사랑에 관련한 윤리를 배우며 접했던 학자였기에, 자유와 관련한 책을 썼을 줄은 몰랐다. 내가 이 책의 저자에 대한 사전 지식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며 책장을 넘겼다.
자유는 참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왜 이 책의 제목은 그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단번에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 작가의 다른 저서 중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란 책이 있는데 이 책의 내용도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비슷한 내용이란 생각이 든다.
책에는 시대적인 배경에서 나오는 자유에 관한 다양한 생각들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인간의 심리를 분석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시대에 따라 자유에 관한 딜레마에 빠지는 인간들의 심리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제3장에서는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가 등장한다. 우리의 운명은 이미 신이 결정하였고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는 무엇일까. 자유의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 또는 그러한 상태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의 저서 자유론에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 대중이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오르면서 그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삶을 살아가는 비주류 소수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한다고 말한다.
여론과 관습을 내세워 대세에 순종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다. 옛날 독재자처럼 정치적·물리적으로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지만 그 대신 개인의 사사로운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마침내 그 영혼까지도 통제하면서 도저히 빠져 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사회는 이런 방법을 통해 모든 사람의 성격과 개성을 사회의 어떤 한 표준에 맞게 획일화하려 한다. 다수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예 그 싹이 트지도 못하게 막는다고 밀은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와 관련하여 밀과는 조금 다르게 개인의 개별성 발휘에 대한 의지와 자각에 좀 더 초점을 맞춘다. 에리히 프롬 즉 저자는 자유라는 것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개인의 개별성의 발휘를 의미한다.
그렇게 개별성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다수의 횡포 속에서 나도 모르게 자유를 잃어 버릴 수 있음을 우리는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자유의 기본적 의미이자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는 소중한 것이며 자유를 다수로부터 잃지 않기 위해 우리는 꾸준히 개성을 가지고 개별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은 사람들이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으로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도 원하는 자유를 얻어 놓고서 사람들은 왜 다시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할까. 자유가 문제가 있는 것일까. 자유의 본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가 문제가 있는 것일까.
학생은 학교로부터의 자유를, 직장인은 회사로부터의 자유를, 주부는 집안일로부터의 자유를 꿈꾼다. 이처럼 우리에게 자유란 욕망의 대상이지 도피의 대상은 아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제목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자유가 감당하기 어렵거나, 부담스러운 것이 아닌 이상, 도피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읽기 전에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제목이 그저 문학적인 표현이리라 짐작했다. 자유란 내가 알고 있는 그 자유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개념을 빗댄 말이고, 그 개념이 감당하기 어렵고 부담스럽기 때문에 인간은 도피하려 한다는 주장이 이어지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저자가 말하는 자유는 내가 아는 그 자유가 맞았다. 그는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인간에게 자유란 감당하기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에 그러한 측면이 있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저자는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자유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먼저 설명한다.
자유의 두 가지 측면 : 해방은 무기력과 불안, 고립과 함께 온다.
자유란 어떤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다. 자유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대로 생각, 느낌,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지배로부터의 해방은 지배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소속감, 안도감,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모두 잊어버려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유가 감당하기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처럼 자유가 고립되었다는 느낌과 무력감을 함께 불러오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로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발생한다.
인간에게 고립감은 맹독과도 같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존재 자체가 사회와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립감을 느끼는 인간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떠한 대가라도 치룰 준비가 되어 있다.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자아를 실현하여 세계와 건전한 관계를 맺는 것이고, 하나는 자유를 포기하고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