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의학과 공중 보건의 발전으로 평균 수명이 대폭 늘어났다고 하지만,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 인간의 어떤 시도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죽음이 모든 것을 이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저자 아툴 가완디의 문제의식은 바로 그...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책의 제목들을 살펴보다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는데, 이 책은 특이하게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초점을 맞춘 것 같아 문뜩 호기심이 들었다. 또, 몇 주 전에 들었던 강연에서 인상 깊었던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문구와 똑같은 책 제목을 보니, ‘이런 우연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 읽어보고 싶었다.
죽음에 다가가는 환자들에게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기만과 거짓이다. 환자들에게 그저 아플 뿐, 치료를 받으면 좋은 결과가 있다고 속이는 것 말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신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이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아툴 가완디가 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올랐던 이미지는 병원 복도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간호사와 의사 모습이었다. 그곳에는 생을 연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의료진이 있고, 그들과 함께 마지막 순간을 견디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자는 의료현장에서 맞닥뜨린 여러 이야기를 바탕으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끝자락에 대해 고개를 들게 만든다. 죽음이 주는 무게감은 여전히 생생히 다가오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어떻게 마지막을 맞이해야 할지 명확하게 알지 못할 때가 많다. 저자는 그 고민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할 기회를 마련해준다. 무엇보다 삶을 마무리함에 있어야 할 태도, 그리고 현대 의학이 어디까지 사람을 도울 수 있는지 살짝 의문을 품게 만든다.
생명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현장에 몸담은 저자는 오랫동안 수술실 안팎을 오가면서 많은 환자를 보았다. 한 명 한 명 각자의 스토리가 있었고, 각자의 문제에 맞춘 접근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의료적 조치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갖는 여러 욕구와 남은 시간의 질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환자와 보호자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자꾸 되짚으면서, 병을 억누르는 데에만 집중하는 것이 과연 옳은 방향인지 묻는다. 숨이 붙어 있기만 하면 되는지, 아니면 좀 더 자신다운 상태로 하루를 더 보내는 선택이 중요한지, 이런 고민은 의사 본인에게도 결코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 속에는 그런 갈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의료 시스템이 점점 정교해지고 있다. 아픈 부위를 치료하는 수단이 늘어나고, 생명을 연장하는 장비가 늘었다. 그 덕분에 사람들은 예전보다 오래 산다. 하지만 모든 이가 편안하고 가치 있는 노년을 보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갑작스럽게 위급한 상황이 찾아오면, 결국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여러 튜브와 장비에 둘러싸여서 고통 속에 누워 있게 된다. 그 상황이 꼭 환자의 희망이나 가족의 바람과 일치하는지도 모호할 때가 많다. 누군가는 기계 장치로 연명하기보다는 편안한 숨을 택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이미 다른 결정이 내려지고 나면 되돌릴 수 없는 경우도 흔하다. 저자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생각했다고 한다.
제목이 매우 대담하고 또 철학적이었다. 아툴 가완디라고 하는 사람은 의사였다. 의사라서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과연 어떻게 죽는 게 바람직한 죽음일까’ 하는 생각을 매우 자세히 적었다. 저자가 접한 고령의 환자, 노인은 대부분 집에서 평범히 죽길 원했다고 한다.
동감할 수 있었다. 살던 곳에서 죽길 원하는 사람은 내 주변에도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응급실에 실려가 수술 중, 치료 중에 작고하거나 아니면 중환자실에서 몇 달을 사경을 헤매다가 돌아가셨다. 그만큼 현실적으로 숙환으로 집에서 세상을 떠나는 것은 흔하지 않다. 정말 쓸쓸하고 눈물나는 문구가 하나 있었다.
고령의 환자가 생사를 넘나드는 치료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가족들이 그저 생명 연장, 연장 치료에 대한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으로서 자신을 대해주어야 한다고 한 점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고 나서, 저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아툴 가완디는 의사로서 환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많이 접하며 느낀 점들을 솔직하게 풀어냅니다. 저는 아직 젊어서 죽음이 멀게 느껴졌지만, 이 책을 통해 죽음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노인과 중병 환자들이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가완디는 우리가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단지 연명치료에만 집중하는 현실을 비판합니다.
그는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공감되는 지적이 많은데 요즘은 어느 나라나 사회나 개인화가 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도 서로 민폐를 안 끼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사실 객사하는 경우도 꽤 있겠지만 대부분 병원에서 숨을 거두는 것이 현실인데 그건 맞는 말이고 이게 뭐 지적받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목숨을 부지하는 건 중요한 일이고 의료기관에서 생명이 끝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저자는 요양원 같은 걸 정착시켜야 한다고 했는데 다만 노인들이 절대적으로 안정을 얻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요양원도 학대 문제가 심해 체계를 고쳐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아툴 가완디라는 사람이다. 저자는 인생에 연속성이 있고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요소가 있기 때문에 삶에 의미가 있다고 했다. 삶의 의미론에 대한 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삶은 연속적이다. 계속 뭔가 뒤틀리고 영향 받고 지속된다.
그리고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점을 찍는다. 그래서 의미있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저자는 삶이 유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적게 원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건 사람마다 다를 거 같다고 본다.
나는 몇 달 전에 수술을 받았는데, 마취에서 깬 직후부터 며칠 동안 굉장히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내가 느낀 고통은 며칠 정도만 지속되는 일시적인 고통이다. 나는 며칠 후면 회복된다는 사실로 며칠 간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었지만, 암과 같은 치명적인 지병으로 죽음이 확정되어 있고, 그 고통은 죽어야만 끝난다면, 나는 과연 죽기까지의 과정을 인내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따라서 어떻게 편안하고 행복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늙어서든 사고를 당하든 병에 걸리든,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오기 마련이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다운 죽음을 원한다. 의사인 저자는 자신의 일터인 의료현장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목격한 죽음들을 의학적인 관점에 기억의 실마리를 얹어 이 책에 풀어놓았다.
저자의 처조모인 앨리스 할머니는 독립적인 삶을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음에도 결국 건강이 악화되자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결정권과 자유를 잃어버리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고, 그녀는 간병인이 먹여주고 재워주고 목욕시켜주고 하는 등의 일들을 모두 결정 당했으며 룸메이트도 결정 당하였기에 앨리스는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저자는 노인분들에 대한 접근이 여타 다른 의학적 접근과는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나열한 사례들은 나에게 요양원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심어주었다.
사람은 죽는다. 이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자연의 법칙으로 예외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현대 의학 기술은 이러한 착각을 강화시켰다고 본다. 이러한 망상은 더 큰 고통을 가져온다. 이 책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인 질문인 삶과 죽음 중 죽음에 대해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를 의료기술에 맡기고 죽음과 죽음의 고통 속에서 죽음 없이 살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인간은 기계에 의존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까지 삶의 의미와 행복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현대의학은 이 분야에 한계가 있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역할을 단지 오래 사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