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우리말의 유장한 리듬에 대한 탁월한 감각, 시간의 지층을 탐사하는 고고학적 상상력, 물기 어린 마음이 빚은 비옥한 여성성의 언어로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의 허기와 슬픔을 노래해온 시인 허수경이 여섯번째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출간했다. 2011년에 나온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2. 시인 허수경
시인의 탄생과 시인의 마지막을 나는 보았다. 허수경은 2018년 10월 3일 세상을 떠났다. 독일에서 수목장을 치렀다고 한다. 유족으로는 독일 유학 시절 지도교수로 만난 독일인 남편이 있다. 시인의 부고를 받고 나는 그 사실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시인이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고, 그 병이 위중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시인의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쉬웠는가. 그건 아니다. 한동안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허수경 시인의 부재가 점점 마음에 와닿았다.
더는 허수경의 시를 읽을 수 없다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건 고인에 대한 예가 아니다. 나는 허수경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언제나 비참의 최전선, 폭력의 최전선, 역사의 최전선에서 살았던 시인이 때론 그 가운데에서 때론 그 옆에서 때론 과거로 돌아가 앞날을 그리는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글을 통해서가 아니라 글을 발표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그런 눈을 갖고 있던 사람이 이제는 사라졌다는 사실이 황망했다.
<중 략>
3.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이 시집은 ‘시인의 말’로 시작해 총 5부로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에 이광호의 ‘저 오래된 시간을 무엇이라 부를까’라는 해설이 덧붙여 있다. 1부는 「베낀」을 포함 해 총 8편이 있고, 2부는 「라일락」을 포함해 총 11편이 있다. 3부는 「동백 여관」을 포함 14편의 시가 있고, 4부는 「수육 한 점」을 포함해 17편의 시가 있다. 5부는 「눈」과 「나는 춤추는 중」을 포함해 총 12편의 시가 있다. 허수경 시인의 마지막 시집에는 총 62편의 시가 있다.
나는 시집을 읽기 전 습관적으로 시집에 수록된 시 편수를 센다. 질이 양을 이기진 않지만 양에서 질이 나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소설도 이왕이면 두툼한 두께를 선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