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죽었다’는 학교 교육 제도 및 문화 비판서이다. 저자는 현대 사회의 학생들이 겪는 문제들은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주로 학교 시스템 자체로 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즉, 현재의 학교 체제에서는 학생 개개인의 잠재력 이나 창의성보다는 획일화된 지식만을 주입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점들이 발 생한다는 것이다.
[학교는 죽었다]의 3장과 4장에서는 각각 학교가 가진 제도적측면과, 학교의 교육과정이 가지고 있는 신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두 장에서 말한 내용중, 나는 3장의 “유년시절”,”교사”와 4장의 “자유에 대한 신화”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고 싶다.
먼저 3장에서는 학교라는 제도가 생겨나 취학연령이 규정되면서 유년시절이 제도화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유년시절 학교의 적절한 보호는 필요하지만, 1) 어른에게 까지 확대대지 못한 보호조치와 2) 학교제도의 지나친 보호로 인해 학생들이 일정나이가 지나도 사회 참여를 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부분에서 나는 “10대 미혼모 문제”와 연관시켜 생각해보았다. 원하든 원치않은 임신이든, 10대 미혼모는 학생이라는 신분임에도 학교로부터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고 학업을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즉, 애초의 학교의 역할인 보호기능 또한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1. 서론 : 도입 및 논의의 중요성이나 목적 명료화
(1) 논의할 문제나 논점 소개(화제 도입)
① 오늘날에는 학력에 따라 봉급의 수준이 결정되고 그 사람이 앞으로 생활해 나갈 모든 삶의 양식이 결정된다.
② 학교는 국가에 의해 독점되어 있다. 학교는 모든 가치와 규범을 규정하는 사회의 재판소가 되어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2) 논의하는 동기나 계기 또는 논의할 필요성이나 가치(문제제기)
① 학교가 가진 문제점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더 나은 교육을 위한 방안에 대해 고려할 필요가 있다.
② 학교 교육에 대해 그 동안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해왔는데,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2. 본론
(1) 구체적인 논점과 내용, 줄거리 정리하기
- 핵심생각① : 학비가 지나치게 비싸 가난할수록 교육을 받기 어렵다.
- 근거 : ㉠ 미국의 경우 1/10에 해당하는 하층민의 자녀들은 평균적으로 5년 동안 학교에 다닌다. 1/10에 해당하는 부유한 사람들의 자녀는 대학원 과정까지 이수한다.
㉡ 미국 하층민 자녀는 2,500달러의 학비가 소요된다. 부유한 사람들의 자녀는 대학원 과정까지 이수하게 되어 소요비용이 35,000달러에 해당한다.
㉢ 볼리비아에서는 국민의 1/10에 해당하는 부유층과 1/10에 해당하는 하층민의 교육비 지출 비용이 300:1에 달한다.
- 핵심생각② : 학교에서 교육기능이 아닌 곳에 소요되는 예산이 상당히 많다.
- 근거 : ㉠ 한 교사의 전체 근무시간 가운데 가르치는 데 소요되는 것은 불과 20%도 못되며 나머지 대부분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통제와 기타 일상 행정업무에 소요된다고 한다.
㉡ 학생들이 12년간 학교에서 배운 것은 사실상 2년이면 충분히 다 배울 수 있는 내용이다.
㉢ 학생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기 때문에 학교는 근무자의 숫자를 늘려왔다.
- 핵심생각③ : 학교는 사회적 역할의 선별기능을 한다.
- 근거 : ㉠ 직업 선택을 위해 장기적으로 값비싼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문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경우, 학교를 다녀도 졸업한 후에 전문 직업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는 학생들을 선별해서 특권적 위계질서의 틀 속에 넣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지배적인 특권적 위계질서에 얽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발달한 사회에서는 학교가 그러한 모든 수단들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대신하고 있다. 교육제도 자체만으로는 그러한 역할을 완전하게 수행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오늘날 확고하게 짜인 교육 체제에 의하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수단으로도 특권적 위계질서를 유지해 나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 사회의 특징이도 하다.
이런 추세로 학교가 사회적 역할의 선별 기능을 앞으로 몇 세대만 계속해 나간다면 우리 사회는 아마도 모든 인간의 가치가 학교의 선별 과정에서 결정되는 무서운 실력 사회로 변할 것이다. 학교는 학생들을 각각 성적에 따라 선별하여 사회의 각 조직에 공급해 주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 장치와 같은 인력 공급 제도이다. 이 학교 인력 공급 제도는 둔한 학생들에게 현재의 자기 위치와 자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배우게 하고 또한 그것에 만족하는 방법을 배우게 한다. 셈이 빠른 학생들도 역시 장래의 자기의 위치를 알고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면서 정착하여 실력에 기초를 두는 세습적 귀족 제도를 재건하려고 노력한다. 능력에 따라서 분배받는 사회는 모두가 다 같이 지옥과 같은 곳이다.
오늘날 학교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실력은 그 사회구조와 부합되는 실력뿐이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특징은 기술문명의 생산물의 경쟁적 소비에 있다고 하겠으며 이것은 다시 제도에 의하여 통제된다. 한편 제도는 현재의 지배적인 특권적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현재의 특권층이 새로운 실력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특권적 지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 한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생산물을 통제한다.
학교에서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기준의 밑바닥에는 부모의 학식 수준이 높다거나 책을 많이 가지고 있다거나 혹은 마음대로 여행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외부적인 환경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1. 학교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육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진부하지만 근원적 질문이다. 현장의 교 사는 물론 어떤 형식으로든 교육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한시도 망각해서는 안 될 질문이다. 항해를 할 때 선장이 수시로 나침반을 보면서 항로를 이탈하지 않도록 점검할 필요가 있듯이 교육의 의미와 목적은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에겐 나침반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교 육에 대한 다양한 정의와 교육의 기능을 일일이 거론할 여유는 없지만, 교육의 본질을 간단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칸트는 “인간은 교육에 의해서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다(Man can only become man by education).”라고 했다.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 이 인간다운 인간이 되도록 하는 작용, 그것이 교육이라는 말이다. 온전한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온전한 인간이란 지성과 도덕성을 갖춘 인간을 의미한다.
1장
요약
저자의 말에 따르면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나중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필요한 지식이 없어서 피해를 볼 수 도 있지만 아마도 심리적 고통은 가장 적게 받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왜냐하면 가난한 학생들이 끝까지 학교를 마칠 가능성이 상당히 적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니지 못한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학교를 다닌 학생들에게서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며,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규정을 어겨서라도 성취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유는 결과만을 중시 여기는 학교 제도 때문이며, 이렇기 때문에 학교는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소감
처음 도입 부분에 나는 저자가 결론을 내리고 시작한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나도 학교를 다니면서 저자와 같은 생각을 가진 적이 있다고 회상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내 주변에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은 사람은 없지만, 아직까지도 대학교를 나오지 않은 친구들은 있는데, 그 친구들을 보면,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대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결국에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 측면에 있는 사람들 모두 슬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장
요약
본 절에서는 학교의 기능을 크게 학생 보호 기능, 둘째, 사회적 역할 선별 기능, 셋째, 이론이나 원리 혹은 사상을 주입시키는 기능, 넷째, 기술과 지식을 개발시키는 교육 기능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네 가지 기능을 결합시킨 부분이 바로 학교에 투입되는 비용을 막대하게 가져왔다고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소감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본 절에서 언급한 네 가지 기능과 관련해서 역할을 하고자 방대한 사교육비가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4가지 기능이 융합되지 못한 까닭에 학교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을 하였다.
1. 여는 말
이 책의 제목은 다소 선정적이다. 학교가 죽어가고 있다는 진행형이나, 죽을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죽었다.’는 과거형이라니. 저자인 E.라이머는 대체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 이런 책을 쓰게 된 것일까.
다른 교육 사회학자들의 보편적인 주장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학교’라는 제도가 계급의 재생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해주고 전인적인 인간으로 키워준다는 본래의 사명을 상실한 학교는 이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의 1장에서부터 5장까지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혹은 보려 하지 않았던 학교의 ‘민낯’을 샅샅이 드러낸다. 학교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가를 설명하며, 교육을 학교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주장한다. 6장과 7장에서는 논의를 사회 전반으로까지 넓혀 보고, 8장에서부터 13장에 걸쳐 대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서는, 각 장의 내용들을 간단히 요약한 후에, 개인적인 감상을 곁들여 글을 맺고자 한다.
1. 학교를 왜 거부하는가
꼭 학교를 다녀야만 하는 걸까?
놀랍게도 전 세계의 대다수 어린이가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다. 학력에 따라 봉급 수준이 결정되고 그 사람이 앞으로 생활해 나갈 영역과 교제할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 즉 그의 모든 삶의 양식이 결정되는 이런 시국을 그들이 모를리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후손들마저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계속되는 교육비용의 증가로 인해 현실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학교제도역시 교육기회의 균등함과 교육기금의 분배관계가 적절치 못하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공교육도 보편적인 종교인 마냥 그 사상을 전파하고 구체화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상을 받아들이게 유도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상황으로 이끈다.
저자인 라이머는 이 장에서 잠재적 교육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했었다. 그가 눈여겨 보았던 것은 잠재적 교육과정중 학교에서 의도한 바 없으나 학생들이 은연 중에 가지게 되는 경험과 학교에서 의도한 바 없는데 가지게 되는 경험 이었다. 즉 표면적 교육과정에서는 의도한 바 없는사회적 위계 질서에 대한 내면화이다. 라이머는 부모들이 학교 교육을 시키려는 이유를 지위 경쟁이론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학부모들은 학교 교육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에 교육을 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비례하여 교육의 가치는 하락되며 실제적인 사회적 경제적 지위는 교육 투자에 비해서 효과가 크지 않다. 따라서 부모나 국가가 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한다.
문제는 이러한 교육 비용의 증가 수치는 학생 수나 국민 소득의 증가 추세보다 빠르므로 어느 나라도 학교 제도를 통하여 국민이 원하는 교육을 실시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교육에 드는 시간과 비용은 엄청난 것이지만 인간의 욕망에 한계가 없고 학위가 사람의 지위를 결정해 준다는 믿음이 있는 한 학교 교육의 끝은 있을 수 없다.
1994년에 발표되었던 오래된 곡이지만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강렬한 느낌을 주는 가사다. 서태지가 ‘교실 이데아’ 에서 적나라하게 비판적으로 묘사했던 작금(昨今)의 학교 모습은 예전의 그것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다. 아니, 어떻게 보면 더 안 좋아졌을지도 모른다. ‘대학! 본 얼굴은 가린 채 근엄한 척 할 시대가 지나버린 건’, 그렇지만 지금도 대학들의 애써 근엄한 척 한 시대가 지나버리지 않은 채 여전히 그들의 이율배반적인 근엄함은 가식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시절은 그래도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新自由主義)시대의 초입으로 대학이 ‘진리탐구의 상아탑’ 이라는 ‘이데아(idea)’ 적인 이미지의 한 면(面)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대학의 모습과 인식은 완전한 시장경제에 편입되어 예전의 ‘이데아(idea)’ 적인 순수하고 명예로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2016년 발생한 이화여대 정유라 부정입학과 부정 학사 관리 사건은 진리와 정의를 탐구해야 할 대학의 인사들이 개인 이익, 개인의 영달과 자신의 미래 출세가도를 열기 위해 정권의 앞잡이로 변모한 사건 사례로, 대학의 ‘진리탐구의 상아탑’ 은 이미 그 본질을 잃고 무너졌다고 평가되고 있다.
대학은 이미 본질을 잃은 것이다. 사람들은 취업을 위해 대학을 진학하고, 대학은 이미 지식을 쌓고 심도 깊은 학문을 정진하는 곳이 아닌 졸업장 취득이라는 괜찮은 직장의 취업을 위한 인증서를 따는 학원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이에 따라 고등학교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입시 학원으로 기능할 뿐이며, 그 속에서 선생님과 학생은 단지 지식을 거래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서글프고 비참한 현실의 교육환경을 라이머(Everett Reimer)라는 교육학자는 무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71년에 저술한『학교는 죽었다(School is Dead)』에서 이미 예견하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