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그리고 왜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해서 항상 고민했다. 하지만 내 안에서 답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고, 삶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결국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가야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을 쉽게 내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 시지프 신화를 읽으면서 내가 앞으로 삶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동시에 어린 나이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글을 쓰는 까뮈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또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물론 책이 쉬웠다는 것, 이해가 완벽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몇 번이고 읽었지만 지금도 남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했고, 이 글도 시지프 신화를 읽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고 글을 쓴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고 다시 한 번 책을 읽은 후에 겨우 쓰고 있는 것이다.
프랑의 저명한 소설가, 극작가로 알려져 있는 알베르 카뮈, 그의 대표작은 세간에 잘 알려져 있는 <이방인>이다. 그는 <이방인>의 발표와 함께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근대 작가 중 칭송받는 작가 중의 한 명이다. 세계적으로 인정ㅂ다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아버지가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던 알제리에서 프랑스계 알제리 이민자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중에 사망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그는 어린 시절을 알제리에서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후 학교에 들어가지만, 어려웠던 집안 사정과 그의 건강으로 인해 어려운 시절을 보내며 자랐다. 그의 저서들을 토대로 살펴본 그의 특징들을 살펴보면 부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세 가지 다른 장르의 문학을 통해 이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전개한다. 소설에서는 <이방인>, 연극에서는 <칼리귈라>, 그리고 철학 에세이로는 <시지프의 신화>가 있다. 그에게 있어 부조리는 일종의 감정이고, 존재 이유와 연관된다.
우리가 늘 하던 일상의 평범한 일들이 어느 날 권태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가령 그 자가 학생이면 늘 하던 공부가 권태롭게 다가왔을 것이고, 선생님이라면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권태롭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조그만 통에 갇혀 쳇바퀴를 돌리는 쥐와 우리가 다를 것이 없다고 여기곤 한다. 그것이 바로 권태로움이다. 또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이 세계에서 규칙, 합리, 질서 등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무의미한 자연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 때 인간의 합리성과 자연의 침묵 사이에서의 괴리감을 부조리(absurd) 라고 한다.
여기서 까뮈는 이러한 부조리를 인식한 인간을 부조리한 인간이라고 한다. 부조리한 인간은 무엇보다도 확실성을 요구하지만, 자기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부조리 뿐 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부조리는 인간의 이성과 불합리한 우주 사이의 대립으로 생겨나며,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자각할 경우에만 존재한다.
시지프는 일생을 반복 속에서 산다. 산 꼭대기까지 바위를 올리고 산 꼭대기에 올라간 바위가 산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 바위를 산 꼭대기까지 올린다. 영원히 같은 일을 영원히 반복하는 삶. 미래를 생각하면 어떠한 기대나 희망을 가질 수도 없이 절망밖에 안 남은 삶이다. 시지프는 이 것을 신들의 뜻을 어긴 죄로 인한 형벌로 받았다. 하지만 보통 인간의 삶도 이와 많이 차이가 있는가. 현대 이전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태어나서 집안의 업을 이어받으며 결혼을 하고 집안을 잇고 죽었다. 현대의 대부분의 인간들 또한 자기도 모르게 태어나 비슷한 교육을 받고 집안 형편과 교육수준에 맞춘 직업을 택한 후 결혼을 하고 집안을 잇고 죽는다. 인간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미래는 결국 죽음에 맞닿아있다.
나는 이따금씩 특별한 이유 없이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무섭게 다가오기도 한다. 고등학생 시절, 아침 7:30에 시작되는 학교와 새벽이 되어서야 끝나던 학원, 주입식 교육의 수업과 시험이라는 매일 반복되는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도, 이 권태롭고 고통스러운 모든 과정은 앞으로 내가 가게 될 대학이라는 곳에서의 얻게 될 성년으로써의 자유, 그리고 가지게 될 학문의 자유를 통해 해결 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견뎌 졌다.
<중 략>
이로써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의 개념은 점점 명확해 진다. 즉 시지프의 형벌은 카뮈가 말하는 삶의 의미와 이 세계의 의미를 보장해 주던 범주들에 대한 ‘허무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허무 속에서 부조리는 모든 해석(=기존의 의식으로 바라보던 세상)에 앞서 적나라한 사실로 놓여있는 세계를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카뮈의 자세는 다분히 반 데카르트 적이다. 즉 카뮈는 데카르트와 달리 명증적인 것이 어떤 이성적으로 주어져 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속에서 실제로 경험되는 ‘부조리의 분위기’라고 주장하였다.
<중 략>
까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읽으면서 나는 현실 속의 여러 문제들과 그 속의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청년실업, 대학생들의 스펙열풍 등으로 현실화 되어 나타나고 있는 88만원 세대의 문제였는데, 사실 나는 이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사회구조에 의한 문제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직도 이런 문제는 필수적으로 그 원인이 사회구조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삶을 사는 태도가 사회로부터 형성된다고 볼 수 있는가? 88만원 세대들의 경우, 그들은 소수의 엘리트만이 살아남게 되는 사회 속에서 승자독식을 위한 잔인한 경쟁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이시대의 청년들은 안락한 삶을 목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스펙을 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