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작가노트 『나는 미학오디세이를 이렇게 썼다』. 1994년 1월 15일 발행한 《미학 오디세이》의 20주년을 기념해 저자 진중권의 집필 과정을 공개한 작가노트이다. 이 책을 통해 파격적인 구성과 대중적이면서도 엘리트주의적인 이중 코드를 활용한 서술, 구어체와 문어체가 창조적으로...
진중권이 집필한 책에 관해 말해보겠다. 특히 1994년에 세상에 나왔던 「미학 오디세이」와, 그 뒤 출간된 작가노트를 중심에 두고 떠오르는 생각을 풀어놓을까 한다. 최초에 공개되었을 때부터 여러 사람의 시선을 끌었던 그 텍스트는 방대한 미학의 역사를 경쾌하게 넘나드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뒤이어 한참 뒤에 나온 작가노트에서 저자는 집필 과정과 심리 상태를 가감 없이 표현하려 한 것 같다. 그 두 저작을 함께 접하면,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아이디어의 흐름이 도드라지게 느껴진다. 간혹 대화체가 등장해서 독자에게 한결 편안한 기분을 선사하면서도 학문적 무게를 전혀 버리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매우 친근하고, 동시에 아주 높은 수준의 사유도 발견된다.
저자는 서양 미학사의 여러 거장들을 등장시킨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생각의 흔적, 르네상스 시기에 새롭게 부상한 예술관, 그리고 현대철학으로 이어지는 굵직한 맥락을 꽤 짜임새 있는 방식으로 묘사한다. 그래도 그 묘사가 지나치게 학술적이지는 않다. 현학적 이론에만 몰두하지 않고, 곁가지처럼 보이는 작은 사례들을 자유롭게 끼워 넣는다. 그러다 보니 지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어느 정도 대중성도 갖췄다고 여겨진다. 가령, 특정 철학자나 예술사조를 설명할 때 단호한 학술 용어만 쓰기보다, 마치 길거리에서 옆 사람에게 이야기해주듯 농담 반, 진지함 반으로 진행한다. 독자는 그 순간 독서의 재미를 느끼다가, 어느새 미학의 깊은 풍경 속으로 빨려들게 된다.
이 작가노트라는 부제목을 단 후속 텍스트도 만만치 않다. 저자가 기획에서 출발해 구상하고 집필하며 수정에 이르기까지 걷는 과정을 소소하게나마 노출한다. 개인적인 일화와 출판사의 요구, 때로는 비판과 트집을 동시에 마주했던 경험담이 나타난다. 저자가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이유로 특정 구성을 결정했는지 엿볼 수 있다. 독자는 그 뒷이야기를 통해, 왜 이 책이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는지 가늠하게 된다. 보통 학술 저작이나 미학 이론서라고 하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딱딱한 어조만 떠오른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편견이 깨진다. 재미있는 만화책을 보듯 훑다가도, 어느새 난해한 언어의 벽을 만나는 순간이 찾아온다.
참 어려운 책이었다. 용어를 알고 봐도 어렵고 예술은 단편적인 지식 몇 개 가지고는 평가는커녕 이해도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현대예술은 대상성을 무너뜨리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사진처럼 정밀하게 사실적 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대상을 다르게 보이도록 만든다는 것이었다.
또 대단한 점은 관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예술을 추구한다고 한 점이다. 굉장히 철학적이고 오묘한 세계가 예술에 녹아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모더니즘 예술은 점점 더 추상적인 개념을 그림 같은 것들로 보여주려고 한다고 했다. 나는 비평 과정을 보면서 지각 과정에서 굉장히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혼자 깨달았다.
내가 예술 언어를 빠삭하게 안다고 해서 미학적으로 평가가 가능하지 않다고 여긴 이유가 사람마다 지각하는 과정, 결과가 상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언젠가 친구와 이런 놀이를 한적이 있다. 길에 앉아있다 여자가 지나가면 외모가 몇점인지 점수를 매기는 일... 점수를 매기고 나서 이견이 있으면 무엇때문에 점수가 다른지 친구와 논의하기 시작한다. 이렇듯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에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있다.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1는 아름다움은 무엇인지에 이야기한다. 가상과 현실의 컨셉을 가지고 고대에서 부터 현대에 걸쳐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가상은 예술을 뜻하며, 시대를 거쳐가며 예술의 목적이 달라진다. 그리고 시대마다 예술을 표현하는 방식역시 달라지는데 어떻한 예술이 타당한지는 두사람의 관점이 나온다.
‘미학’이라는 용어에 지금보다 조금 더 낯설었을 때 이 책을 읽었다. 아직도 낯설지만 말이다. 다행인 것은 제목이 주는 묵직함에 비해서 재미있게 읽었다는 것이다. 집 책꽂이에 꽂혀있는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을 우연히 읽은 적이 있다. 귀엽고 작은 책이지만 촛불을 바라보는 몽상적인 세계에 , 시적인 세계에 어렴풋이나마 잠겨 들어갔던 것 같다. 어려운 용어도 많이 나왔지만 건너뛰며 읽을 만했다. 한 사람의 몽상가가 고독한 불꽃을 응시하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혼자 타오르면서 혼자 꿈꾸는 것, 소박하면서도 면밀하고 광적이기도 한 것, 불꽃의 많은 이미지 중 하나로 기억된다. 불꽃의 촉촉한 소리라던가, 불꽃의 수직성이라든가, 촛불의 시적 연주라든가 아주 아름다운 표현도 나왔다. 어려운 용어 속에서도 빛나는 시적 언어들이 가득했다. 촛불 하나 갖고도 책 한 권을 써낼 정도로 깊숙한 내면의 생각을 써내려간 바슐라르의 책을 읽게 된 건 행운이었다. 이것이 막연하나마 미학이라는 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미학이란 무엇이고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관념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아름답다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미학이란 단어가 가슴으로 와 닿지 않았다. 아름다움도 모르는데 미학의 개념조차 알리 없었고, 그렇기에 우선 이 책의 재미를 느끼는데 중점을 두고 읽었다.
나는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미학이라는 소재가 흥미롭기보다는 저자 진중권이 설정한 서술의 전략 덕분일 것 같다. 특히 저자의 서술과 근근이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대화 내용이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것 같다.
더불어 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알맞은 대표작들을 하나 하나 보여주기에 오히려 글을 읽는 시간보다 그림을 보는 시간이 더 많다. 에셔라는 네덜란드 판화가의 작품을 토대로 주제를 나눠 미학에 대해 풀어나가다 보니 그림 설명 그림 순으로 진행되어 몰입도가 더 뛰어났다.
미학으로 떠나는 여행, 나에게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어려움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여행은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하고 시작해야 하는데 미학 오디세이를 읽는 동안에 나는 지도를 들고 길을 못 찾는 여행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도에는 내가 가야 할 길이 나와 있고 지도대로 걷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을 잘 보지 못해서 같은 자리를 뱅뱅 돌거나 걸어도 도착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은 열심히 노력해서 책의 끝이라는 도착지에 도착했고 미학이라는 거대한 성의 입구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2권, 3권을 더 읽어보아야 진정한 미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1권을 통해서 미학의 시작과 전개 과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 진중권을 좋아하던 친구가 추천하길래 봤던 기억이 나는 책인데, 읽은지가 너무 오래전이라 처음 읽는 기분이였다.
아마 처음 읽었을땐 중학생때였으니 너무 어려서 내용도 잘 이해하지 못한채로 다 읽었을 것 같다.
뭐 그렇다고 지금 읽어보니 딱히 쉽고 재미있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구어체로 쓰여진 부분이 많아 쉽게 읽히는 편이였고 아무래도 책에 미술사의 전반적인 내용이 많이 등장해서인지 어디서 본 얘기가 많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쉽게 읽히는것과는 별개로 내용의 이해가 쉽지는 않았다.
이해가 안된다기보단 옛 사람들의 대화내용을 보니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굳이 저런 개념을 사용해야하나?
내가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지 못한탓일까. 플라톤과 아리스의 대화를 보며 이게 예술이구나 하고 깨닫기보단 그저 미신같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플라톤이 4도음정의 단조로운 음악을 들으며 그것이 정의, 절제, 지혜, 용기를 뜻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하는 부분을 보며 정말 옛날사람들은 단순하고 화음도 없는 음악을 듣고 의미부여를 하며 그것을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느꼈을지 의아스러웠다.
예술에는 여러 가지 활동들이 있다. 시에서부터 조각, 회화, 음악 등등... 이밖에도 요즘은 난타나 공연예술 등 그 범위가 더욱 확대되어가고 있다. 점점 예술로써의 관심이 늘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에서는 예술의 개념자체가 아예 없었다. 물론 시나 음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 예술이란 말이 자리 잡지 않고 있었다. 대신에 고대에는 테크네란 말로 예술을 조금이나마 대신하고 있었다. 인간의 제작활동이나 기술 등을 뜻하는 말로써 건축이나 회화는 포함되었지만, 인간의 감성이나 정신적인 면을 다루는 음악이나 시는 테크네에서 소외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차츰 18세기 중엽에 와서야 예술이란 개념이 자리 잡게 되었다.
<아테네학당>의 작품에서 플라톤의 손은 하늘 위를 가리키고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보듯이 그만큼 플라톤은 이상세계를 중시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지각할 때 이미 가지고 있는 개념적 사유를 적용한다(어린 아이가 그린 개구리의 예). 그러나 구석기 시대 원시인들은 아직 개념적 사유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을 보이는 대로 그렸다. 신석기 시대에 농경이 시작되면서 인간은 추상적인 사유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사물의 일반적 특징만을 추상하는 기하학적 양식을 발달시켰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양식과 기하학적 양식은 오랫동안 미술사를 지배하게 된다.
인간은 왜 예술을 하게 되었을까? 유희 기원설은 인간의 남아도는 에너지를 방출하기 위한 통로가 예술이라고 본다. 예술이 노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예를 들면 노동의 수고를 덜기 위해 노동요를 불렀다는 것이다.
<중 략>
그리스 예술의 고전기 이전까지의 시기인 아르케익 시대에는 신체 부위간의 기하학적 대칭을 중시했다. 따라서 자연성이 억압되고 엄격함과 딱딱함이 표현되었다(고古 양식).
아테네가 경제적, 정치적으로 전성기였던 고전 시기에는 조각상은 위대함, 숭고함, 거대함을 표현했다. 신체의 대칭도 약간 흐트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