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계몽의 문명 사회가 어떻게 야만에 빠졌을까? 기술 진보가 절정에 달한 시대에 야만 상태를 빚어낸 현대는 어떤 시대이며 인류는 어떻게 이러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나치즘을 통해 타락한 몰골을 드러낸 서구 중심적인 이성과 문명을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비판한 20세기의 고전....
원래 계몽은 인간을 가르쳐 일깨운다는 의미로 이를 통해 인간이 보다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계몽을 통해 인류는 종교에서 벗어나 과학적 연구를 가능하게 했으며 인간 스스로 존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등 문화에 있어 다양한 발전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특히 계몽의식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18세기 유럽은 기존에 존재하던 종교의 깊은 그림자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는 등 가톨릭교회와 대립하는 사상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계몽은 역설적으로 그 내용에 따라 일방적으로 집단 이기주의를 발생시킬 수 있으며, 사회 전반을 획일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러한 계몽의 역설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를 든 것이 바로 독일의 파시즘이다. 군국주의 및 전체주의를 그대로 표방하고 있는 히틀러의 독재 아래 인류 최악의 홀로코스트가 자행되었다.
「계몽의 변증법」은 이러한 예시들을 통해 계몽이라는 개념의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야만성을 비판한다. 특히 현대사회의 경우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가능하게 된 대중문화가 사회 전반을 획일성을 가진 정체성으로 유도하고 오히려 인류가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보통 이론적 동기나 외부의 강한 충격 때문에 저술을 결심한다. 계몽의 변증법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현대적 야만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게 이 책을 쓰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이 책을 서술하면서 현대적 야만과 비판적 대결을 시작했고, 서술과정에서 그들의 학문적 운명 또한 변화했다. 현대적 야만의 뿌리는 뒤늦은 국민국가 형성으로 인한 독일의 집합적 열패감에 기인한다.
1. 내용 요약
첫 번째 ‘계몽의 개념’에서는 “신화는 이미 계몽이었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는 명제를 통해 신화적 자연과 계몽 된 자연을 비교 분석하고 두 개의 부연 설명을 통해 계몽의 한계를 지적한다. 첫 번째로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의 개념’에서는 서구적 문명을 대변하는 <오디세이>를 중심으로 신화와 계몽의 변증법에 대해 추적한다. 희생과 체념의 개념을 통해 신화적인 자연과 계몽 된 자연지배의 동일성과 차이성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을 통해 칸트 니체 사드 등을 언급함으로써 모든 자연적인 것을 주체 밑에 굴복시키는 것이 궁극적으로 맹목적 객체성과 자연성의 지배 속에서 어떠한 정점을 이루었는가에 대해 다룬다.
‘문화산업: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에서 계몽이 어떻게 이데올로기로 퇴보하는 가에 대해 논의한다. 영화와 라디오 등의 매체를 매개로하여 퇴보의 전형적인 표현을 고찰한다. 매체 속에서 계몽은 무엇보다 생산과 분배에서 효과와 기술을 계산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기술을 조종하는 권력을 신격화함으로써 본연의 사명을 수행한다. 이러한 모순을 다룸에 있어서 문화 산업은 좀 더 진지하게 취급된다. 또한 이 장에서는 계몽의 야만성과 사회전반을 획일화하는 대중문화 산업을 비판한다.
‘반유대주의적 요소들:계몽의한계’ 에서는 반 유대주의의 요소들을 명제별로 다루어, 계몽 된 문명이 실제 현실이라는 맥락을 바탕으로 계몽이 어떻게 야만 상태로 회귀하는가에 대한 과정을 보여준다. 자기파괴로의 실제적 경향이 합리성 안에는 처음부터 그것이 드러난 단계에서뿐만 아니라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반유대주의의 철학적 역사가 구상되었다.
‘스케치와 구상들’에서는 ‘사실에 정통함에 반대하여’, ‘프로파간다’ 등 앞에서 논의된 사고 범위에 속하는 것이나 변증법적 인류학과 관계된 스물 네 개의 짧은 글로 구성된다.
벤야민과 아도르노는 대중문화가 아니라 문화산업을 비판대상으로 삼고 『계몽의 변증법』을 썼지만, 대중문화 옹호자들에게 대중문화를 헐뜯는 엘리트주의자라는 딱지를 부여 받았다.
사람들은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를 분리해서 대중문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고급문화를 숭상하는 엘리트주의자라고 치부해버린다. 고급문화는 돈 많고 지식인들의 것으로 생각하고 대중문화는 서민의 애환을 담은 것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저급문화든, 고급문화든 문화 산업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 양 문화의 차이는 형식적 차이에 불과하다.
아도르노는 ‘야만적인 현재 사회의 문화’를 비판한 것이지 ‘대중문화’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다.
대중문화는 대중으로부터 자생적으로 산출된 문화인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물건처럼 똑같은 형태로 천편일률적이게 되었다. 이것은 문화산업의 독점에 의한 것이다.
“문화 산업의 목표는 이윤이다. 돈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는 문화산업이 사로잡혀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트하이머는 새로운 기술자체의 정치적 가능성이 아니라 새로운 기술이 문화산업에 적용되었을 때 출현하는 사회적 특성에 주목하여 문화산업을 계몽의 개념과의 연관 속에서 분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