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시 <페루>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 시인 이제니의 『아마도 아프리카』. 거침없는 상상력과 역동적 리듬, 그리고 발랄한 화법으로 2000년대에 문단에 등단한 젊은 시인 중 독보적 개성을 인정받으며 주목과 기대를 모아온 저자의 첫 번째 시집이다. 미끄러지고...
분홍 설탕 코끼리는 발에 꼭 끼는 장화 때문에 늘 울고 다녔다. 발에 맞는 장화를 신었다 해도 울고 다녔을 테지. 어릴 때부터 울보였고 발은 은밀히 자라니까. 두번째 분홍 설탕 코끼리가말했다. 그렇다고 코끼리가 두 마리 있는 건 아니었다. 설탕이 두 봉지 있는 것도 분홍이 두 바닥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언덕도 없었지만 분홍 설탕 코끼리는 오늘도 언덕에 누워 설탕을 먹고 분홍에 대해 생각했다. 코끼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니, 있었나. 아주 오래전 일이라 잊었나. 설탕, 하고 발음하면 입안에 침이 고인다. 바보, 모든 설탕은 녹는다. 뚱뚱해지는 건 시간문제. 계절이 지나자 분홍 설탕 코끼리는 분홍 설탕 풍선이 되었다. 아니, 그건 잘못된 말이다. 분홍 설탕 코끼리는 분홍 풍선 풍선이 되었다. 아니, 그것도 잘못된 말이다. 분홍 설탕 코끼리는 풍선 풍선 풍선이 되었다. 할 짓이 없구나. 네, 그럼요 그럼요. 풍선 풍선 풍선은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 서운했다. 막 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사랑받는 느낌도 없었다. 친한 사람들끼리 그러듯 막 대해줘도 좋을 텐데. 풍선 풍선 풍선은 일부러 잃어버린 장화 한쪽을 손에 들고 이미 녹아버린 설탕을 음미하면서 하늘에 떠가는 분홍 설탕 코끼리를 바라보았다. 구름 같았고 추억 같았고 눈물 같았다. 불지 않는 바람의 깃털 사이로 풍선 풍선 풍선의 없는 꼬리가 한 번 나부꼈다. 아니, 두 번 나부꼈다. 아니, 세 번 나부꼈다. 분홍설탕코끼리풍선구름. 멋진 이름이다. 어제부터 슬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분홍 설탕 코끼리
시는 분홍 설탕 코끼리가 풍선 풍선 풍선이 되어, 그러니까 정체성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게 슬픔을 삼키는 내용이다. 이렇듯 그녀의 시에는 서사도 있고 인물(?)도 있고 정서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시인의 경험에 기반한 것이냐... 하면 그 색깔이 매우 옅다.
『아마도 아프리카』 속 세상은 말 그대로 아프리카 같은 세상이다. 아프리카의 이미지가 은연중에 내비추고 있는 신비함과 이질성, 그리고 그 안에 담긴 태곳적 원시성까지도 이 시집은 시적 언어로 담아내고 있다. 게다가 아프리카 주술사의 춤이 보여주는 몸의 언어처럼 알 수 없는 슬픈 웃음 역시도 묻어나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들은 결코 억지스러운 수식과 이미지간의 연결로 이루어져있지 않다. 물론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놀라울 정도로 심리적 거리가 멀고 그만큼 이미지의 전환도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갈 곳 잃은 모습으로 흐트러져 있지만은 않다. 오히려 그러한 모습을 통해 이제니 시인은 혼란 속에 내재된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표제시인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코끼리 사자 기린 호랑이/멀리 있는 것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부르다가도 화자는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아마도 나는 아주 조금 살고 있어요”라고 내뱉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양파가 익어가는 속도로” 울고 있음을 고백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