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유년기로부터 중년기에 이르는 여성 주인공들의 내면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하여 여성적 삶이 빚어내는 정서와 의식, 마음의 무늬와 운명성을 깊고 섬세하게 펼쳐 보이는 소설집 『 유년의 뜰』. 오정희 소설을 대표하는 제3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저녁의 게임》, 표제작 《유년의 뜰》을 포함한 모두 8편의...
‘유년의 뜰’을 읽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인상적이었던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써 봅니다. 자신의 감상이 잘 드러나도록 두 문단 이상으로 작성합니다.
이 글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나에게 부네는 말 그대로,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나'는 부네와 일면식도 없으면서, 어둡고 외로운 밤이면 부네의 자물쇠 잠긴 방 치를 바라본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는 알 방법조차 없는 부네의 감정들과 공감한다. 나는 글을 읽는 내내 부네의 존재가 궁금했다.
오정희 단편선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표제작인 ‘유년의 뜰’ 작품 뿐만 아니라 ‘중국인 거리’, ‘저녁의 게임’ 등 여러 작품이 포함된 책이다. 이 모음집은 여성 주인공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데, 특히 표제작인 ‘유년의 뜰’과 ‘중국인 거리’에서는 어린 주인공의 시점에서 회상과 후각과 시각을 중심으로 한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6.25 전후의 혼란스러운 시대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유년의 뜰 주인공인 나는 ‘노랑눈이’라고 불리며 식탐이 많고 말수가 적어 할머니의 걱정과 구박을 받는 대상이다. 아버지의 부재와 지속되는 피난생활로 어머니는 밥집에 출근을 하게 되고 그런 어머니가 못마땅하지만 겉으로는 막아낼 힘이 없어 때 지난 중학교 영어 책을 읽으며 어머니의 출근에 시위를 하는 오빠, 그리고 어머니의 귀가 늦어질 때 마다 언니를 때리는 행위는 아버지의 부재 상황에서 ‘오빠는 자신이 가장임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어 언제나 침울하고 긴장으로 부자연스럽게 굳어 있었다.
<유년의 뜰>에서 노랑눈이 나는 먹을 것에 집착하는 뚱뚱한 소녀이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 피난을 온 후 어머니는 밤마다 읍내밥집에서 일을 하다가 늦게 돌아오거나 잦은 외박을 하고 큰 오빠는 그것에 대한 저항으로 영어교과서를 크게 읽는다. 전쟁 속에서 급작스럽게 찾아온 할머니는 까무러져가는 동생을 돌보느라 엄마를 대신할 보호자가 되지 못한다. 때때로 언니를 따라 저녁거리에 나가 저잣거리를 구경하지만 오빠의 폭력에 무력한 언니는 어린 나를 돌보지 않는다.
전쟁은 주로 남성들이 주체가 되어 총 칼을 겨누며. 피를 흘리고 싸웠지만 그 피해자는 남성으로 그치지 않는다. 오랫동안 가부장제의 전통 속에서 한 집안의 가장인 남편, 아버지, 아들이 전쟁터로 끌려 나가게 됨으로써 실질적인 힘을 가지지 못한 여성들은 그에 못지않게 많은 수난과 비극을 겪는다. 전쟁의 직접적인 여파인 죽음, 부상, 강간 등의 문제 말고도 전쟁 이면에 거의 모든 여성들이 겪는 문제점이 있는데, 이것은 실로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의 부재는 여성에게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수난을 가져다주며 그 속에서 파생되는 여러 문제점 - 예를 들면 돈을 벌고 양육을 하는 등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여성에게 부과된다. 특히 가부장제의 전통 속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전쟁터가 된 국토나, 전후의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이는 가족 공동체내적으로의 많은 갈등과 어려움을 수반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을 보며 앞서 읽었던 <사랑손님과 어머니>라는 소설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소설 모두 화자를 어린 아이로 등장시키고 있으며, 여성성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다. 화자가 어린 아이이지만, 느낌은 매우 다르다. <사랑손님과 어머니>를 배울 때, 우리는 주인공이 사회적 통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시각에서 서술되었기 때문에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소재가 순수하게 그려질 수 있었고 아이가 알 수 있을만한 단어를 사용하거나 아이가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서술되어있다고 배웠는데 <유년의 뜰>에서는 어쩐지 아이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책은 피난민 가족 이야기인 동시에, 여성의 성장 이야기이다. 전쟁으로 아버지가 징용을 나가게 되면서, 가족들은 아버지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비롯된 결핍을 겪게 된다. 그런데 아버지의 부재 상황을 그리는 이 소설의 시선은 미묘하다. 아버지가 없는 가족은 가난하고 아이들은 방치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부장제 윤리가 이완된 틈으로 여성 가족 구성원의 욕망이 분출된다. 이런 상황에서 1인칭 화자이자 주인공인 노랑눈이는 성장(혹은 비성장)하게 된다. 「유년의 뜰」의 첫 장면은 어머니와 오빠의 기묘한 대치를 인상적으로 그린다. 저녁 햇빛이 칼처럼 방안에 꽂힐 즈음, 어머니는 화장을 시작하고 오빠는 영어책을 읽는다. 이 장면을 전해주는 이는 노랑눈이라 불리는 1인칭 화자인데, 오빠와 어머니를 바라보는 노랑눈이의 시선과 감정은 복합적이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어머니와 오빠를 번갈아 보며,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호기심과 찬탄으로 거울 속에서 점차 나팔꽃처럼 보얗게 피어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막 넓게 퍼지기 시작한 완강한 어깨 위로 아직 연약하고 섬세한 목과 작은 머리통이 불균형하고 어색하게 얹혀 있었으나 이미 청년으로서의 단단한 골격이 잡힌 몸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어머니와 오빠의 대치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전쟁이 길어지고 아버지의 부재가 계속되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머니가 읍내 밥집에 나가야 했으며 그러다 보니 어머니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들려오게 된다. 그리고 지금 어머니는 밥집으로 출근하기 위해 화장을 하는 중이다. 가족들로서는, 특히 오빠로서는 수치스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을 것인데, 아버지 없는 집에서 가부장 노릇을 해야 했던 오빠는 지금 영어책 읽기를 가장해서 가부장제의 윤리로 어머니를 검열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를 바라보고 있는 노랑눈이의 시선이다. 노랑눈이의 시선은 가부장제의 윤리를 알지 못하는 ‘순진한 눈’이다. 노랑눈이는 어머니의 저녁 화장을 호기심과 찬탄으로 바라보는데, 이 시선에 의해 가부장제의 윤리가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흔히들 세상이 내게 등을 돌려도 곁에 남아 주는 사람, 영원한 내편은 가족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족이 그 누구보다 큰 상처를 안겨주고 남보다 못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경우도 많다. 사회악으로 꼽히는 가정폭력은 생각보다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가정폭력이라 하면 보통 엄청난 폭언과 신체적 폭력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렇게 눈에 보이는 폭력 이외에도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모든 걸 통제하려하거나, 매사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며 자존감을 떨어지게 하는 것, 무관심과 방치 그리고 형제간의 차별 등도 가정폭력이다. 상처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정신이 갉아먹힌 그들은 평생 씻어낼 수 없는 상처를 간직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앞의 상황들과 다르게 서로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가족이란 이름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다른 가족구성원에게 상처를 안겨주는 경우가 있다. 철없는 사춘기시절 한순간의 감정으로 부모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줄 수도 있고 부모가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자녀에겐 평생 가슴에 남을 수도 있다.
전시 혹은 전후 상황을 배경으로 한 영화 또는 문학작품이 많이 있다. 보통 전쟁 자체를 다루기도 하지만 전쟁이라는 커다란 사회적 경험 속에서 황폐해지고 망가지는 개인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들도 많다. 예전 전쟁 영화 중에 『굿모닝 베트남』이라고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작품이 있다. 그 영화에선 가장 치열하고 참혹한 전장에 what a wonderful world라는 아름다운 노래를 삽입하여 독특하고 강렬한 효과를 냈다. 관객들이 오히려 아름다운 음악을 통해 전쟁을 바라봄으로서 전쟁의 본질에 대해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역설적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장치는 『유년의 뜰』에서도 보인다. 아이의 시선이야말로 앞서 영화 속 선율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 노랑눈이는 모든 것을 바라보고 느끼고 내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