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에서 전해지는 뭉클하면서도 따뜻한 위로!2015년 소설집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로 민음사 오늘의문학상, 황순원신진문학상을 수상한 구병모의 장편소설 『한 스푼의 시간』. 도발적이고 환상적인 상상력, 신선하면서도 생생한 캐릭터들, 발군의 문장 그리고...
너의 그 한 마디 말도
그 웃음도
나에겐 커다란 의미
너의 그 작은 눈빛도
쓸쓸한 그 뒷모습도 나에겐 힘겨운 약속
너의 모든 것은 내게로 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네
- 산울림, <너의 의미> 가사 중에서
가수 아이유가 리메이크하여 1020세대에게도 재차 인기를 끈 산울림의 명곡 <너의 의미>는 관계가 한 사람의 삶에 가져다주는 활기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무의미한, 때로는 적의가 가득한 세상의 말과 행동들 속에서 유달리 너의 말 한 마디, 눈웃음, 눈빛과 뒷모습은 나에게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나의 청소년기는 아름답지 않았다. 특히 열여덟 살의 나는 이제 막 상담 치료를 중단한, 불안정하고 불온한 존재였다. 주위의 모든 소녀들이 그러했듯 나는 일상 곳곳에서 아득함을 느꼈다. 끝이 없는 입시 준비,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가족들, 한 번을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세상이 미웠고 온종일 멀미 중인 것 같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도피하고 싶어 했다. 동시에 아주 절박하게, 현실에 안착하고 싶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나에게 필요했던 건 상담사의 형식적인 치료가 아니라 담백한 충고였다. 예컨대 인간의 삶에 대해 숙고한 뒤 가장 논리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로봇의 조언과 같은.
청소년소설 <위저드 베이커리>로 유명한 작가 구병모의 소설이다. 이번에는 어떤 신선하고 놀라운 이야기를 풀어낼지 두근거리며 읽어보았다.
아내와 사별을 하고 사고로 외아들마저 명정은 어느 날 정체불명의 택배를 받게 된다. 죽은 아들이 보낸 소년의 모습을 한 로봇이었다. 그는 둘째 아이가 생기면 붙이고 싶었던 이름인 ‚은결‘을 붙여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프로그래밍이 그렇게 되어서겠지만 주인과 눈이 마주치자 양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흡사 미소 짓는 모양이 되었다. (중략) 영원히 부를 일이 없을 줄로만 알았던, 그러나 상상 속에서 수도 없이 불렀기에 낯설지 않은 존재의 이름이 구체적인 발음과 형태를 띠고 혀끝에서 흘러내리는 순간, 그는 이 유용한 도우미를 가족 비슷하게 맞아들이기로 결심했다.
흔히 인간이 근육을 써서 미소를 짓는 것처럼 로봇도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우리는 ‘인간답다’라는 단어를 언제 사용할까. ‘그는 따뜻하고 인간답다.’, ‘우리 인간답게 정정당당히 살아가자.’처럼 ‘인간답다’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인간답다’의 사전적 정의는 ‘됨됨이나 하는 행동이 사람으로서의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듯하다.’이다. 동양의 유교적 측면에서 보면 인의예지(仁義禮智·어짊, 정의, 예절, 지혜) 사덕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인간답다’는 실질적 정의와 사전적 정의가 모두 긍정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런 인간성을 현대 사회에서 볼 수 있는가? 구병모 작가의 소설 <한 스푼의 시간>은 로봇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다움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한 스푼의 시간>은 가난한 마을에서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는 명정에게 어느 날 17세 소년의 모습을 한 로봇이 배달되며 시작한다. 아내와 사별하고 외아들 또한 불의의 사고로 잃은 후 단신으로 살아가던 이에게 뜻밖의 가족이 생긴 것이다.
1. 머리말
구병모의 <한 스푼의 시간>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편소설이다. 주요 인물은 17세 소년형 로봇 ‘은결’과, 은결을 아들 삼아 지내는 세탁소 주인 ‘명정’ 등이다. 소설 초반에서 은결은 주변 인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명정의 고객이자 초등학생이었던 ‘준교’와 ‘시호’가 대학생이 되고, 이웃인 ‘세주’가 혼자서 아이를 임신하고 낳기까지의 시간이 흐르자, 은결은 변한다. 인간의 말투에 녹아 있는 뉘앙스를 파악할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명정이 노화로 사망하자 계획에 없던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은결의 포스트‘휴먼’적인 면모를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이 은결과 공존한 방식이 어떠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또한 <한 스푼의 시간>이라는 작품이 소재로서의 포스트휴먼을 개연성 있게 다루었는지도 논의해보고자 한다.
창비 청소년 문학상으로 멋지게 데뷔한 구병모는 여러 가지 수상은 물론이고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이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다. 나는 내가 공부를 위해 꼭 읽어야만 하는 책들과 사회인으로 읽을 의무가 요구되는 교양서들 사이에서 괴롭고 지루할 때면 꼭 구병모의 소설을 찾는다. 탁월한 문장력과 흡입력 있는 전개가 장점이지만, 평범하게 표현하자면 그녀의 소설은 재미있다. 의무감을 가지고 읽는 책들 사이에서 한 번씩 읽는 그녀의 소설은 재미 때문에 괴로움을 잊게 해주고, 완벽한 소설이란 이런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이런 용도이기에 내가 그녀의 소설이 출간되자마자 읽는 경우는 없다. 아껴뒀다가 머리를 식힐 겸 읽는데, 용도보다 훨씬 큰 값어치를 하는 작품이다.
구병모의 소설 <위저드 베이커리>를 인상적으로 읽은 후, 같은 작가의 책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은 2016년 9월 예담에서 출판되었다. 사람들과 같이 살면서 그들의 신비한 감정들을 알아가는 한 로봇의 이야기이다. 로봇의 등장이 새삼스럽기도 했지만, 끝까지 읽어보았다. 우연히 세탁소에서 일하게 된 로봇’과 ‘세탁소를 찾아오는 손님들’ 그리고 ‘세탁소 옷 속에 씨앗을 넣어주는 로봇’까지 구상하고 2010년에 한 출판사에 건넸을 때 편집부의 반응이 괜찮았는데, 당시 다른 소설을 진행하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그 이후 이 소설은 문장웹진 2016년 2~4월에 수록한 경장편소설을 수정 증보한 것이다. 빌라 골목, 40년 가까운 2층 주택과 원룸 형태의 주거공간이 늘어선 동네에 커다란 택배가 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세탁소 안으로 들어가는 택배는 폭 1미터 높이 2미터에 이르는 크기이다. 세탁소 아들은 출장길에 비행기와 함께 사라졌다. 사고 이후 시신도 못 찾았다. 외국에서 같이 일하는 회사 직원이 보낸 택배가 6개월이나 걸렸다. 그 택배안의 물건은 인간형 로봇이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세탁소에 살게 된 로봇 소년 ‘은결’이 유한한 인간의 시간 속 숨겨진 삶의 비밀과 신비함을 조금씩 배워가는 과정을 섬세하면서도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다.
평균 연령 20세 가량의 빌라골목이다. 엊그제 막 신축이 끝나 건축 자재와 도배장판 냄새가 나며 카드키를 댈 때마다 LED 센서가 발광하는 빌라 옆으로 마당에는 감나무가 서 있고 장마철이면 때때로 물이 차는 반 지하방마다 서로 모르는 이들이 세 들어 나는 40년 가까운 2층 주택이 나란히 자리한 식이다. 그 사이사이 빌라들 옆으로 늘어선 상업 건물들은 모두 4층 미만이며 1층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룸 형태의 주거 공간이다. 골목 중간에 있는 세탁소 안으로. 택배기사가 폭 1미터 높이는 2미터에 이르는 상자를 들고 나타난다. 문을 밀고 들어오다 상자가 걸리자 기사는 투덜거린다.
어느 날 세탁소 주인 명성이 상자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해독 불가능한 영문의 홍수 속에서 그는 하나의 단어를 알아본다. ROB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