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무엇을 배워도 소용없다", "무엇을 배우든 인생은 어차피 변하지 않으며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는 니힐리즘, 나아가서는 "일편단심 공부에 매달리는 일은 바보 같은 짓", "배우는 것의 의미를 모르겠다", "나는 바보라서 배워도 모른다", "어떤 내용의 지식과 문화도 나와는 상관없다", "세상이야 어찌 되었든 내가 알 바 아니다"라는 식의 시니즘은 대체 왜 생겨나며 왜 이렇게 많은 아이들 속에 깊이 침투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을 다 읽게 되었을 느낀 감정들은 안타까움이 대부분 이었다. 이 책은 2003년에 1쇄가 출판 되었고 일본은 이미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그 후 15년이 지나 2018년이 되었는데, 큰 틀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교육은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아직도 산업주의에 최적화 된 교육을 강조하고 있고 그로 인해서 경쟁에서 밀리는 탈락자들, 일관된 길 말고 다양한 길로 가려는 학생들을 여전히 정책을 만들 때 생각하지 않아 보인다. 나 역시 12년의 의무교육기간동안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것을 위해서 공부해야하는지, 왜 경쟁해야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그냥 대학만 가면 된다고 하였다. 대학에 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고, 지금까지 대학만 보고 살아왔는데 막상 대학에 오니까 이제부터 어떤걸 목표로 살아야하는지, 어떤걸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허무감도 많이 느꼈었다.
군 복무 시절 나는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재학했다는 이유로 평택에 있는 방정환 어린이 센터에서 아이들을 3시간정도씩 봉사활동을 하는 보조교사로서 근무했었다. 주 보직이었던 헌병업무와 같이 병행하여 힘든 일이기도 했지만 가정에서 그 아이들을 보호할 어른이 없었고, 학교에서도 방치되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센터를 나갔다. 그 때 당시 센터에는 많은 책들이 있었고 부대에서 할 일도 딱히 없었기에 책을 많이 빌려와서 읽었다. 그 중 하나가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 이었다. 그 당시에 이 책을 읽고 깊이 생각을 해보거나 지금의 우리나라와 비교를 해본다거나 하는 학습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느낀 바는 많았다. 당시에 센터에 나오던 아이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였으며 교사를 꿈꾸는 나로서도 한층 더 교사로서의 소명의식과 책임감을 고취시킬 수 있었던 책이라고 기억된다. 이 책을 교직과목인 ‘교육과정’에서 과제로 다시 만나니 너무나 기쁘고 무언가 아련한 기억이 떠올랐다. 제대할 때 추억될 만한 물건을 챙기던 중 이 책도 센터에 양해를 얻어 같이 들고 제대를 하였다. 그만큼 나에게는 생각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해주었던 책이었다.
군인 신분이 아닌 학생신분, 그것도 사범대 학생신분으로서 읽은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일본의 무너져 가는 교육계를 그냥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닌 우리나라의 현 상황과 미래의 상황을 전망하여 비교할 수 있었고 또 나의 중,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며 과거를 비교할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미국이나 유럽보다는 우리나라와 붙어있는 일본이기에 교육환경도 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안 좋은 역사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강대국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도주 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을 읽고
초등 교사가 꿈이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전에 교육에 관련된 서적을 많이 봐야겠다고 항상 생각해왔는데 마침 이번에 학교에서 과제로 원하는 종류의 책을 선정해주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의 제목을 본 순간 ‘도주? 아이들이 배움을 기피한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며 학원 수업 도중 화장실 가는 척하며 놀러갔던 옛날 모습이 떠올랐다. 이 책의 저자는 수업을 듣는 것보다 놀러가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을 비판하기 위해 글을 썼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도 했지만 ‘도주’라는 단어가 왠지 어떠한 압력이나 주변 환경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라는 뜻임을 짐작하고 ‘글쓴이는 사회를 비판할 것인가 아이를 비판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물론 보통 책들은 사회를 비판하겠지만 말이다.
이 책은 ‘따돌림’, ‘부등교’, ‘소년범죄’와 같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학교에서의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 모두가 일부 아이들만의 현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만들어진 위기이고 정말 심각한 위기는 바로 배움으로부터의 도주라고 한다. 이 부분에서 납득도 갔지만 처음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일명 ‘왕따’나 ‘소년 범죄’보다 학교에서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입 전까지 선생님들 입에 항상 왕따나 범죄와 같은 것만 올랐었기 때문이다.
(중략)
리더쉽과 창의력, 종합적인 사고능력을 원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외면한 채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그것대로 가르친다. 그래서 인생을 한 번에 결정 하게 될지도 모르는 무한한 변수가 존재하는 대학 입시에 가까워질수록 아이들은 더더욱 도주하고 싶어 한다.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을 배우는 수업에 임하는 아이들, 그에 따른 학급붕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이러한 문제점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선 교육의 궁극적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은 물론, 문제의 교육이 되어버리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된다. 따라서 교육의 참의미를 실현 시킬 교육을 만들기 매우 어렵겠지만 우리 다음세대를 위해 현실에 맞는 교육 정책을 피고, 사회 전반적인 인식도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
1. 들어가며
어느 날 한 여고생이 쓴 시를 접한 적이 있다.
나는 오늘도 내 자신의 한계를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절제하고 견디려 노력한다.
그러다 한순간 방심하면 모든 노력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나는 오늘도 시간에 쫓기며 피로한 몸을
등지고 하얀 종이에 글씨와 숫자를 채워 나간다
지금은 힘들지라도 미래의 내 모습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시간을 쪼개어 공부한다
.......(중략).......
18세가 꽃다운 나이라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똑같은 나날을 반복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경쟁하며 살아간다
나는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 하고 싶은 것을
다 포기한다
나는 오늘도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과목과
똑같은 일과로 하루를 마친다
아직까지 나의 인생은 단 하루뿐이었다
중략-
‘공부’와 ‘배움’을 분리한 저자의 생각을 통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진짜 공부’라는 것이 이 ‘배움’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우리나라 사회문제 중 가장 논란도 많고 이슈가 되는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교육문제이다. 언제나 대학입시전형과 교육과정변화로 여론은 들끓고,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교과학습 진단평가시험은 많은 논란 속에 치러졌다. 거기에 이젠 외국어 고등학교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이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교육관계자뿐만이 아니다. 한간에는 ‘국민 모두가 교육 전문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학생과 학부모들의 목소리 또한 점점 높아지고 있고 그 영향력 역시 크다. 그러나 전 국민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현재 모습은 ‘공교육의 위기다’, ‘학교가 무너지고 있다’등 부정적인 의견으로 넘쳐난다. 부모세대가 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스승님의 그림자를 밟을 수도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교사를 고소하는 학생, 자식을 때렸다고 교사를 폭행하는 학부모에 대한 뉴스가 빈번히 쏟아지고 있다. 또한 학교문제에 ‘왕따’, ‘학교폭력’ 등 학생들의 학교생활에 생각지도 못할 정도의 문제들이 나타났고, 그 상황도 위험수위를 넘어 심각한 문제로 언론을 통해 계속적으로 보도되어 왔다. 그리고 학교문제는 아이들의 행동으로 보이는 ‘왕따’, ‘학교폭력’, ‘학업 중단’등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교사, 교육정책에 대한 그리고 입시에 대한 더 많은 문제점들이 지적되고 보도되었다. 그야말로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이나 뉴스에는 우리 아이들의 문제와 개탄을 금치 못하는 교육 현실에 대한 기사가 실리거나 방송된다. 하지만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의 저자는 이러한 문제점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더 큰 문제점을 보아야 하고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토 마나부는『배움으로부터 도주하는 아이들』에서 가장 큰 문제점을 아이들이 ‘배움’으로부터 도주하려 한다는 것과 그로 인한 학력저하로 이야기하고 있다.
학력저하의 심각성은 비단 일본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그와 같은 문제로 속을 끓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공식암기’등 기초적인 내용에 관한 문제에는 강하지만 창조적인 사고와 다의적인 사고, 그리고 추론적인 사고에서는 약하다는 특징까지 너무나 비슷하다.
이렇게 한국, 일본, 그리고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문제점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겪었던 비슷한 역사적 경험과 특징들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교육의 역사를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동아시아 국가들의 교육시스템은 매우 흡사하다. 소위 압축된 근대화라고 하는 산업화 과정 속에서 교육이 가진 역할이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 우는 단기간 고도성장 속에서 그 어느 나라 못지 않은 활발한 사회계층이동을 가져왔다. 이때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교육’이
아니 였었나 되짚어 본다. 가장 가까운 예로 아버지세대만 해도 그렇다. 비록 우리 아버지는 그 기회를 잡지는 못했지만, 삼촌들은 시골의 가난한 환경 속에서 교육을 통해서 지금의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교육을 통한 경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귀속적 지위를 갖는 것도 아니고 교육을 통해서라면 얼마든지 계층이동이 가능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교육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교육은 목적에서 수단으로 변질되어 갔고, 그 순간 이제는 배움은 진정한 배움이 아니고, 학교 역시 진정한 학교가 아닌 게 되 버렸다.
학교의 졸업장이 한낱 종이 한 장에 불과한 가치가 되어가고 있는 요즘, 대한민국의 대다수 청년들이 ‘대학’의 문턱을 밟아봤고, 그 결과 고학력 실업자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가 표현했듯이 학력은 통화가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넘치는 통화 속에서는 그 실질적인 가치가 하락할 수밖에 없는데, 아직도 과거의 대졸자와 같은 조건과 대우를 받고자 한다.
그러면 이렇게 ‘학력(學歷)’은 상승하고 있지만 오히려 ‘학력(學力)’은 저하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우리나라 교육정책면에서 볼 때 최대 문제점은 입시 위주의 교육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수십만 명의 어린 학생들이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공부를 하는 목표가 자아실현이나 자기 계발을 위한 것이 아닌 일부 명문대에 진학에 있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역사적인 면을 생각해보면 된다. 과거에는 양반과 상민의 계층의 구분이 태생적인 한계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현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지식의 획득을 통해 신분의 상승, 성공의 욕구 등을 충족할 수 있게 되면서 사회적인 교육열풍이 이루어졌다. 선진국에서 교육열풍은 학문에 목적을 둔 교육으로 이루어지고 더 높은 수준의 학문적 성취로 이어졌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명문대의 간판을 향한 맹목적인 교육만이 자리 잡게 되었다. 따라서 대학을 가기위한 공부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학생들은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도 망각한 채 오로지 명문대학을 가기 위해 인생을 살아간다. 자신의 흥미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모던타임즈’의 찰리 체플린처럼 학생은 기계처럼 암기를 하게 된다. 이런 암기 위주의 교육은 학생들의 사고력 발달을 저해하게 된다. 따라서 학생들은 획일화 된 사고를 가지게 되며 교사의 말이면 다 믿는 무비판적의식이 팽배해지게 된다. 이러한 획일화된 사고는 급격히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죽은 지식에 불과하다. 현대사회에서는 대량 정보, 지식 속에서 현실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지 판단하는 비판적 사고력과 새롭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창의적인 사고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또한 수능으로 인해 일생이 결정된다는 생각이 팽배해져서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수백만원짜리 불법과외를 하거나 학원을 다니기도 한다. 따라서 수능 고득점을 목적으로 중요한 내용만을 콕콕 집어서 가르치는 학원교육을 중시하고 학교교육을 경시하여 일종의 주객전도 현상이 발생했다. 이것은 학교 현장에서도 잘 나타난다. 학교 수업시간에는 엎드려서 자고 밤에 학원을 가면 눈을 초롱초롱 뜨고 공부하게 되는 학생들이 그 예이다. 이것은 어느 한 학생의 모습이 아니라 학교 교실의 전반적인 분위기이다. 이로 인해 학교 교육은 점점 붕괴 되어 가고 있다.
저자는 책에서 현재 가장 심각한 교육문제를 아이들의 ‘배움으로부터의 도주’라고 말한다. 이지메, 학교붕괴 등의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문제는 매스컴으로 부각되어서 그렇지 실제로는 일부 아이들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 하나하나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든 것이 일부 아이들의 현상이라는 것에 주의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일본의 경우를 얘기한다지만 우리나라 학교만 살펴보아도 문제아들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보다 큰 문제는 아이들의 학력저하인 것 같다. 학습량은 과거에 비해 늘어난 데 반해 학력이 저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을 품어본다.
홈스쿨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일본에서 말하는 자유학교나 홈스쿨은 사적인 학원이지만, 미국에서 말하는 자유학교다. 말하자면 미국은 교사자격증을 취득한 교사가 교육과정을 다루는 사립학교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홈스쿨에서 교육비 부담은 학부모에게 돌아간다. 부득이하게 학교를 다니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러한 이유로 일본의 부등교 빈도가 높게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실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홈스쿨의 움직임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아무리 원격교육시스템이 발전하고, 가정에서 충분히 학습 가능한 교육과정이 개발된다 하더라도 홈스쿨링은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는 단순 지식만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사회성을 배우고 인격을 형성한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은 핵가족화로 인하여 아이들의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다. 몸이 불편하다든지, 불가피한 사정이 아닌 이상은 홈스쿨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교육의 문제점들은 ‘교실붕괴’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과 매우 흡사하다. 이 책의 저자 사토마나부는 이러한 관점에서 정말 잘못된 것은 ‘학생 자체’가 아닌, ‘학생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실제로 교실 안 풍경이 어떤지 수업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고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 들여다보지 않고, 대중매체에 의해 만들어진 신빙성 적은 사실들과 몇몇 특정 사례들을 일반화하여, 금방이라도 공교육이 붕괴되고 학생들이 교실을 뛰쳐나올 것처럼 확대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위기의 논의에 있어서 교육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과 신뢰성 있는 자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는 교실붕괴보다 더 큰 교육문제는 바로 배움으로부터 아이들이 도주하려고 하는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 뿐 아니라 압축된 근대화를 달성한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뜻 보면 일본을 비롯한 한국, 중국, 대만 등의 동아시아 국가는 교육열이 높아 아이들이 학교에서나 학교 밖에서나 공부하는 시간이 많은 나라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아이들도 입시 경쟁에 시달려 학원 다니기에 바쁘고 세계 아이들과 비교해 학습시간이 많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밝힌 최근 조사에 따르면 중학교 2학년 학생의 방과 후 학습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고 ‘아예 공부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한 학생도 43%나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의 증가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일류대학의 학생 10명 가운데 2명이 초등학교의 분수계산을 못한다”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라는 것이다.
이러한 학력저하에 대한 비판론은 일본에서도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대학의 입시제도가 바뀌면서 수험생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교과목 수를 줄이고 쉽게 출제하게 되면서 대학수학 능력이 떨어지는 대학생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학력저하에 대한 비판론들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는 도쿄대학을 포함하는 전반적인 대학생들의 기초학력 부재에 대한 논의로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최근 일본에서 문제시되었던 이지메(왕따현상), 교실붕괴와 같은 교육문제가 큰 시각 차이 없이 우리나라의 언론에 소개되고, 우리교육에 대해서도 동일한 비판을 가했던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처럼 배움으로부터의 기피현상과 학력저하 문제는 현재 일본뿐 아닌 우리나라의 심각한 교육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