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이 약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이 두 문장 사이에는 만날 수 없는 큰 간극이 있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앞의 두 문장은 서로 번갈아 나타나며 그때그때 자신이 진리인 것 마냥 우리를 설득한다. ‘모르는 것’은 너를 골치 아픈 현실에서 구해줄 ‘약’이고, ‘아는 것’은 너를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줄 ‘힘’이라고.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진리는 아니다. 두 격언 다 악마의 속삭임일 뿐이다. 악마의 속임수는, 허구를 말하기보다는 진실을 교묘하게 뒤섞는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악마의 유혹에서 진리를 되살리자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르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고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약’이 될 수 있다.
세상의 악은 종종 모르는 것을 약으로 여기고, 아는 것을 힘으로 여기는 태도에서부터 나온다. 알고 싶은 것만 알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알고 싶지 않은 채로 내버려두는 태도는 주변에서 (필자를 포함한) 누구에게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태도이다. 흔히 반지성주의로 대표되는 많은 사람들의 태도는 ‘타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회와 발달은 전문가의 등장을 이끌었다. 무엇이든지 자급자족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삶의 다양한 부분을 전문가에게 맡기고 있다. 의사, 미용사부터 수리공까지 전문가의 존재는 이제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되었다. 전문가의 등장은 우리의 편의를 증진시키는 동시에,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대한 책임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였다. 사실 오늘날의 사회 규모나 생활방식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중에 신학자, 성직자는 종교계(특히 개신교계)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인들이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책임을 지도록 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전문 신학은 평신도들과 점점 분리되어 오늘날에는 성도들과 신학자들이 따로 놀기까지 이르렀다. 신학은 전문가들만 할 수 있는 작업이 되었고, 평신도들의 관심은 떨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