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붓다가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닦은 명상법을 탐구한다. 붓다의 명상법인 마음챙김 명상은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의 측면을 지니며 수행법은 공통적으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다. 마음챙김 명상은 사마타 수행을 통해 삼매를 기르고 삼매의 힘의 지원을 받아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통찰지의 터득에 이르는 길이다.
붓다의 명상법은 위빠사나 명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붓다의 명상법에는 사마타 수행의 측면과 위빠사나 수행의 측면이 있으며 마음챙김 명상의 사마타 수행은 붓다의 등장 이전에 인도아대륙에 존재해왔던 요가적 명상의 사마타 수행과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다. 붓다의 명상법과 관련하여 사마타 수행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세계 불교계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상좌부불교가 절대적 준거로 삼는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에 요가적 사마타 수행의 요소가 유입되었고 그러한 내용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붓다의 명상법에 포함된 것으로 간주되어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호흡의 개념에 집중하거나 까시나라는 표상에 집중하는 수행법은 동남아시아의 대다수의 수행선사들은 따르지 않지만 일부 수행전통이 이를 수용하였고 무엇보다도 『청정도론』과 아비담마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그러한 명상법을 팔정도의 맥락에서 바른 삼매(정정)에 이르는 바른 마음챙김 명상(정념)으로 간주하였다. 표상에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이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근거는 붓다의 명상법은 경험을 있는 그대로 마음챙겨 알아차리는 수행이며 감각의 제어를 위해서도 붓다는 표상이나 부분상을 취하지 말 것을 설하기 때문이다.
표상이나 개념에의 몰입을 위한 집중을 수행하는 명상법은 붓다의 등장 이전에 인도에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요가적 사마타 명상이 불교 전통에 유입된 것이라는 점을 해명한다. 요가적 명상과 『청정도론』이나 아비담마에 포함된 까시나 명상과 같은 사마타 수행법이 유사한 점을 미흡한 수준으로나마 밝혔고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유식불교를 통해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두 명상 전통이 싹튼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고려할 때 요가적 명상은 신과의 합일이 진리의 원천이라는 믿음 아래 힘과 지혜의 완전한 모델로서의 신의 개념에 집중함으로써 완전한 몰입 상태인 삼매에 도달하여 개념 너머의 초월 세계로의 전이를 추구한 것이다. 반면 붓다는 무신론적인 성향의 소유자로서 초월 세계가 아닌 경험 세계, 현실 세계의 진실상을 꿰뚫어 보고 무명을 타파하여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추구하였다.
마음챙김 명상의 구체적인 수행체계는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 즉, 사념처 수행인데 몸과 마음을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네 가지 대상(영역)으로 나누어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닦아 두루 정화시켜 통찰지를 계발하기 위한 명상법이다. 사념처 각각에 대한 가르침에 수관의 가르침이 나타나는데 삼매를 위한 사마타와 통찰지를 위한 위빠사나를 유기적으로 닦는 수행법이라고 이해된다. 마음챙김 명상의 목표인 통찰지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 즉, 끊임없이 연기법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들의 특상인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고 지혜로써 깨닫는 것이다. 지혜는 무지를 타파하기 때문에 통찰지의 터득은 무명에 의한 모든 번뇌를 소멸시켜 열반에 이르게 하는 직접적인 요인이다.
자전거 탄 소년의 핵심내용을 요약해 보았고 영화의 시사점이 수업시간에 배운 불교에서의‘공’과 관련있다고 생각해‘공’의 관점에서 시릴에 대해서 분석해 보았다. 자전거를 탄 소년 (시릴)은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보육원에 가게 된다. 사만다는 시릴의 위탁모가 되어준다. 불량배들과 어울리게 된 시릴은 범죄를 일으킨다. 이 세 가지 사건 후 사만다의 도움으로 시릴은 누가 먼저 자신에게 시비를 걸면 끝까지 쫓아가 복수하는 성격에서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뉘우칠 줄 알게끔 성장하게 된다.
시릴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고 믿지 않으며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도 믿지 못한다. 후에 사만다 덕분에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시릴이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찾아오지 말라 말한다. 시릴은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는다. 대신 아버지가 준 자전거와 언제나 함께 있다. 사만다 덕분에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시릴에게 말도 없이 번호를 없애고 이사를 하고 자전거를 팔았음에도 자신을 버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