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지은이는 1953년 '쑥 이야기'가 『문예』에, 1956년 '파양'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해서 근 반세기에 가깝게 글을 써오고 있다. 이번 소설집은 한국 문학에서는 정말 드물게, '노년의시간'을 정면에서 소설적 소재와 주제로 삼아 8편의 '노년' 연작으로 묶어 펴냈다.
표제작 '아주 느린 시간'은 신도시에 사는 다섯 노인들의 이야기를 차례차례 전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죽음을 애증어린 친구처럼 끼고 사는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중 다음의 두 대목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나는 느낀다네. 모든 걸 털고 해결하고 세상을 뜬다는 생각 자체가 무의미하고 사치스럽다고. 아니 주제넘어. 죽는 날까지 사람인 것이 사람의 노릇인데 완전 종결이 어딨어. 가당찮은 허영이지."
"아무런들 과거를 볶아 먹거나 재탕하면서 살지는 않을래. 번듯한 직함을 시원섭섭하게 떨어내기는 커녕 죽을 때까지 끌고 다니는 위인들 있지? 사실은 불쌍한 사람들이야. 냄새 나도록 낡은 그 망토를 벗는 날로 자기는 볼장 다 본다고 믿기 때문일 거야. 그냥 이렇게 있다는 확신이 나는 좋아. 사는 것이 어차피 별거더냐 생각하면 편하고, 거기서 꾸역꾸역 고개를 쳐드는 용기를 확인하는 순간이 더 좋아. 매사를 뒤집어보는 용기. 그게 진짜라고, 아까 그 사람도 말했어."
죽음을 끼고 도는 노년의 지극히 일상적인 삶들은 어느덧 지은이의 절묘한 문학적 균형감각을 통해 오늘 우리를 읽는 텍스트로 전달된다. 문장 사이사이 흐르는 해학과 서정으로 한 시대를 그리는 이 창작집은 죽음을 향해 가는 인물들에게서 역설적이게도 동경을 담아낸다.
신도시 당산에서 살아가는 중산층 노인들의 이야기들이다. 민 선생은 지하철을 타고 친구의 문상을 가는 길이다. 동승한 아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한편 김 선생은 좌우 이념 대립이 극심하던 시절 실수로 정 선생의 형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데, 노년기에 정 선생과 한동네에 살게 되자 그에게 과오를 고백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려고 한다. 이에 정 선생은 자신 역시 젊은 시절 저질렀던 과오를 털어놓으면서 삶의 자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