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회복하는 인간>은 발목에 입은 화상을 방치해 거의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어 병원을 찾아온 여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회복하는 인간>이 유독 아픈 소설로 느껴지는 이유를 언니 삶의 불행과 남겨진 동생의 슬픔 때문이라고만 말한다면 충분하지 않다. 언니와 동생의 어떤 ‘관계’ 때문이라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그대로 내 뿜어버리고 싶다가도 머릿속에서 계획을 짜다가 다시 풀어버리곤 하는 늦가을 출근길이었다. 나의 무능력인가 아니면 성격상의 소심함과 부끄러움인가. 착하게 베풀고 살았건만 돌아오는 것은 그에 반해 형편없다는 소리다. 실리를 추구해야 하는것인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데 다정해지려고 노력해야 다정함이 나온다. 생각하고 있어야 억지로라도 나온다. 답이 없다. 잘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못 한 것이 되는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고 타인의 입방아에서 시작이 된다면 골치 아프다. 잊어버리려고 해도 싫은 건 싫은 것이다. 고통이 없는 관계는 나밖에 없다. 비가 내리라는 것을 모른다. 다행히 저번 주에 비가 와서 우산을 챙겨왔다가 책상에 놓고 갔다. 다행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사람은 모두 거기서 거기라는 풍문과 달리, 우리는 눈도, 코도, 입도, 어느 하나 같을 것 없이 다르게 태어났다. 몸과 마음이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각기 다른 호와 불호를 느끼게 되고 점차 호의 영역을 빠르고도 깊게 확장해나가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땅을 파고 벽돌을 쌓는다. 이렇게 형성된 건축물을 우리는 '세계'라고 부르자.
그러나 21세기의 두 번째 10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자신만의 '세계'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지난 200년간 이어온 자본주의는 모든 것의 본질을 흐리고 아우라를 빼앗아갔으며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1935)
이제는 자기 세계를 흉내 내는 '가짜 세계의 등장'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이윤의 추구가 모든 것의 목적이 되어버린 작금의 세태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주 성실하게 또 아주 정성스레 구축된 세계들이 남아 있다. 이것은 어떤 것에 의하여 본질이 흐려지지 않았으며, 조용하지만 견고하고도 단단하게 구축되어있다. 이 소수 인원에 의한 세계는 이제 새로운 것이라 해도 어폐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들을 신세계(新世界)라 부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