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탄생 시기를 짚었다. 에디슨과 뤼미에르간 발명 경쟁이 있었지만 영화란 혼자 보는 것이 아니라 ’집단 제의’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영화의 시초로 뤼미에르의 손을 들어준다. 십여 년 동안 뤼미에르가 열심히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뒤는 미국인의 차지가 되었다. 천재 영화감독이라는 ‘포터(대열차 강도)’와 ‘그리피스(국가의 탄생)’ 등이 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는 어떤 문화의 차이가 있다. 미국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인 ‘프래그마티즘’은 일종의 결과론으로 결과가 좋다면 다 좋다는 느낌을 준다. 결과가 대의명분, 자긍심 보다는 눈에 보이는 ‘돈’이 제일일 것이니 프래그마티즘이 영화 산업 발달을 위한 기초인프라가 되었겠다. 일본인을 이코노믹 애니멀로 부르다가 그 미명을 한국인이 계승하게 되었는데 원조는 아메리칸이 아닐까 생각된다.
산업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한 미국과 선동 혹은 예술의 측면에서 영화를 보는 유럽은 애시당초 경쟁이 안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