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격정만리>는 192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 우리 연극사에서 격정에 찬 연극배우들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식민 지배와 분단으로 인한 역사의 비극이 예술가들의 삶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그려 내 격동의 세월 속에 사라져 간 광대들의 삶과 예술이 오늘날 우리 연극사에 거대한 뿌리로 존재하고...
격정만리는 노인이 된 이월선이 옛 동료인 박철을 만나 딸 선화의 소식을 전해 듣고 지난 삶을 회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서막을 보면 관객은 당연히 이월선의 과거를 다루고 있겠거니 생각하는 것이 보통인데, 극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이월선이 아니라 홍종민의 이야기라는 점이 특이하다. 물론 홍종민은 극의 말미에서 처형당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연출이라는 생각도 든다.
보통 연극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시·공간, 인물의 제약을 많이 받는다. 영상처럼 CG나 편집을 사용할 수도 없을뿐더러 연극에서 나타나는 시간의 비약은 관객들로 하여금 몰입을 깨트리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격정만리>는 극의 초반부터 ‘1989년이라는 팻말이 보여진다’는 지시를 통해 주로 영상 매체에서 사용하는 연출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출이 가능했던 것은 어쩌면 <격정만리>라는 연극 자체가 관객의 완전한 몰입을 전제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