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버마 시절』은 열린책들이 2009년 말 펴내기 시작한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의 103번째 책이다. <열린책들 세계문학>은 젊고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태어난 고전 시리즈의 새 이름으로, 상세한 해설과 작가 연보로 독자들의 깊이 있는 이해를 돕는 한편 가볍고 실용적인 사이즈에 시선을 사로잡는...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 이는 현실태(energeia)로서의 존재보다 가능태(dynamis)로서의 존재가 본질에 더 가까우므로 더욱 가치 있음을 함의하는 진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예술(techne)에서 모방(mimesis)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며 이러한 주장을 개진하였지만(김혜숙, 김혜련, 2007), 이는 단순히 예술 영역을 뛰어넘어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삶 전반에 걸친 지향에 대해 날카로운 통찰을 드러낸다.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바는 가능태와 같은 본질(essence)의 실재 여부에 있지 않다. 그러한 본질은 철학적으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있다고 볼 수도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우리 인간이 어떠한 형태의 본질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확고히 ‘믿으며’, 본질이라 믿는 것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신의 편협한 역사를 시로 승화시키고, 자신만의 경험을 법칙으로 전치하며, 결국에는 우연을 필연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필연과 법칙과 시에는 특별한 가치가 채색된다. 이러한 조작 기제(manipulation mechanism)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인간 활동으로 식민지배만큼 훌륭한 예시가 또 있을까 싶다.
소설 <버마 시절>에는 이와 같은 우연의 필연화가 두 가지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서평 pp.385-386 참조).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와서 좀 더 머물러 달라고 빌”(p.43) 것이라는 생각에 내포된 백인 우월주의와 “무관심과 미신으로 가득 찬 우리(p.56)”로 대변되는 유색인종의 선천적 미개성에 대한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