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시집 「매장시편」으로 등단한 임동확의 시집. 긴 호흡과 풍성한 비유를 통해 광주의 정신적 흔적을 질서화하고 있다. 표제작인 <매장시편>은 광주 항쟁의 비극성을 신화적 상상력과 교호하면서 준열한 어조로 노래한다. <개정판> <양장제본>
▶ 민음의 시 26권 재출간!
20여 년 동안 140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누군가에게는 숫자만 들어도 전해오는 먹먹함일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한국 근현대사의 사건을 부르는 숫자 정도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1996년에 서울에 태어난 내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철없던 학생이 우러러보았던 하나의 신화였고, 프랑스 시민혁명이나 영국 대혁명과 구별되는 가끔의 자랑스러움으로 매도되어버린 교과서였다.
두렵고 편리한 망각의 강물 소리를 듣는다
따스하고 청명한 봄날의 정오에,
더 많은 고통과 시련의 미래를 생각하며.
(제 1장 우리가 정든 거리를 떠난 이후의 알리바이 2「……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 Ⅱ 부분)
그것은 차라리 망각이었다. 잊었고, 버렸으며, 돌보지 않았다(忘). 피했으며, 사양했고, 물리쳤던 것(却). 1980년으로부터 16년, 또 대학생 2학년으로 다시 20년. 그 때의 먹먹함이 내게까지 전해질 리가 만무했다.
< 중 략 >
당사자도, 그저 목격자도 상처뿐이었던 그 도시, 그 시간. 그것은 차라리 인간의 짓이 아니어야만 했다. 『매장시편』은 신화의 서사시처럼 느껴지는 시들이었다. 무언가 인간의 합리와 생각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던 일, 그랬기에 신화를 빌려와 설명했었던 ‘시’. 신화를 빌려오지 않고서야 설명될 수 없던 잔혹한 짐승의 시간. 매운 독가스와 풀 향기가 저물 무렵 아랫녘 밥 짓는 연기로 타오른 것은 이유도 불분명한 경건 “가난과 굶주림. 매운 독가스와 풀 향기가 / 저물 무럽 아랫녘 밥 짓는 연기로 타올랐다 / 이유도 불분명한 경건, 가벼운 회한이 교차하는 제단 앞에서” 임동확, 「저물 무렵」의 3연의 2행부터 4행.
이었다. 아니 그것은 당연한 경건이었다. 밥 짓는 연기는 일상이었으며 그것은 다시 비일상 속에서의 일상이었고, 제단의 연기와 같은 경건함이었다. 시는 보여주고 있었다. 밥 짓는 연기가 제단의 환상으로 보여지는 경건함이란 결국 그 배경이, 장소가, 그 곳이 얼마나 비일상적이었는가. 비일상의 참혹함에서도 그들은 왜 나아가야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