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는 로마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인물이다. 단 한명의 천재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로마를 이끌어갔던 것은 40세라는 늦은 나이 때부터였다. 어떻게 보면 그 나이 이후 10여 년 동안 이루어간 업적이 로마에 길이길이 남아 훗날의 로마를 만들고 수많은 이들의 찬양과 존경을 이끌어 냈다는 점을 보면 더더욱 카이사르라는 인물에 대해 매혹되게 되는 것 같다.
카이사르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카이사르는 그의 가족자체가 훌륭한 귀족가문은 아니었지만 그의 혈통은 당대 최고 중 하나이던 율리우스 씨족이었고 이 배경은 그가 훌륭한 교육을 받는 원동력이 되었다. 거기에 타의 귀감이 되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는 훌륭한 모정과 더불어 가르침은 그가 탈선하지 않고 바르고 뛰어난 로마인 사내가 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오늘날도 카이사르를 만들어낸 위대한 어머니로 평가받고 있을 정도이다.
로마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있다. 바로 고대 그리스이다. 그리스 문명은 BC 2000년 전후에 크레타 섬에서 시작되었다. 크레타 문명이 쇠퇴한 후 미케네 문명이 발달하였으나, 트로이 정복 후 반세기 만에 미케네 문명이 도리아인으로부터 철저히 멸망당하였다. 그리스 땅을 정복한 도리아인은 기원전 800년 경, 스파르타를 건설하였고 도리아인으로부터 쫒겨 도망간 아카이아인은 아테네를 건설하면서 도시국가(폴리스)가 세워졌다.이후 그리스는 식민활동을 시작했는데 크게 1차 식민활동과 2차 식민활동으로 나뉜다. 1차 식민활동은 기원전 9세기 말부터 8세기 초까지 소아시아 서해안(이오니아)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2차 식민활동은 8세기 중엽, 지중해 전역에서 벌어졌는데 자국에서 먹고 살 수 없거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자들이 식민활동의 주체가 되었다. 그리스인들이 식민 진출할 때는 모국에서 언어, 종교, 진취적 기질 및 독립에 대한 생각만 가져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유적을 살펴보면 그리스 식민지에 기원을 둔 도시(나폴리 – 아테네, 타란토 – 스파르타, 시라쿠사 – 코린트)들이 모두 모국과 관계가 희박한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로마와 대표적인 차이점으로 로마는 식민지와 모국 사이에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그리스의 대표적인 도시국가였던 아테네는 초기에는 왕정이었으나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귀족정치로 바뀌었다. 장로회가 보좌하며 자유시민들이 민회를 구성하였으나 자유시민들은 발언권이 거의 없었다. 기원전 7세기에는 토지소유를 경제기반으로 하고 있던 귀족 계급과 상공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신흥계급간의 대립이 거세졌다. 경제력이 있음에도 국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신흥세력들이 반발한 것이었는데 이들을 ‘데모스’라고 불렀다. 결국, 기원전 594년 솔론이 ‘솔론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솔론 자신은 신흥 계층이 아닌 명문 귀족 출신이었는데, 자작농들을 빚더미로부터 구제하기 위한 정책을 입안 후 법제화 하였는데 이는 고대 사회 최초의 인권존중 사례이다.
Ⅰ. 서론
<로마인 이야기> 중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관한 4․5권을 읽고 감상을 서술하기 전에 로마란 어떤 나라이고 세계사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는지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로마는 현 이태리를 지리적 위치로 하여 전성기에는 광활한 영토와 문화의 진흥을 누렸던 나라다. 그때 이루었던 모든 것들이 현 시대의 문화유적과 서적 그리고 다양한 매체 등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실로 그 당시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 가능하게 한다. 그러한 로마를 지배했던 왕들과 로마의 통치자들 중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는 로마 역사의 ‘위대한 독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지금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과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가 평가한 카이사르, 그리고 이에 대한 사견을 말하고자 한다.
Ⅱ.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
1. 삼두정치
카이사르는 로마의 최고 고위직인 집정관에 오를 것을 희망했지만, 카이사르 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원로원은 그가 집정관이 되는 것을 방해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