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다산의 모든 것을 읽는다!다산 연구에 평생을 바친 다산 연구의 권위자 박석무가 집대성한 다산의 삶과 정신 『다산 정약용 평전』. 병들어 쓰러져 가는 세상을 치유하고자 한 선각자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을 담은 평전으로,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문제...
다산 정약용은 영조 재위 38년인 1762년 6월 16일(양력 8월 5일) 사시(巳時, 오전 11시경)에 태어났다.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은 나주 정씨로, 집안은 당색으로 남인이었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입장이었던 시파에 속했다. 다산 집안은 8대 옥당 가문이었고, 어머니 윤씨 부인은 해남 윤씨 사람으로 같은 남인에 시파였으며,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자 공재 윤두서의 손녀였다. 두 집안의 출중한 핏줄을 이어받아서인지 다산은 어려서부터 영특했고, 네 살 때 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자 바로 글자를 알았다고 한다. 7세 때는 「산」이라는 첫 시를 지어 주위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고, 10대 초에 이미 시문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수준에 이르렀다. 다산의 어머니는 다산이 아홉 살이던 해에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다산은 후에도 기회만 있으면 묘소를 찾곤 했다.
다산은 15세의 성년이 되자 명문 가문인 풍산 홍씨 가문의 규수에게 장가를 들고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서울 회현동에서의 생활은 지식인들과 함께 어울리게 해주었고, 다산의 안목과 식견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년 반 남짓한 서울 생활 후 전라도 화순 현감으로 발령 난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화순으로 내려갔는데, 이때 동림사에서 둘째 형인 정약전과 함께 독서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며 꿈을 싹 틔웠다. 화순의 풍광을 시로 읊기도 하고, 무등산에 올라가 시도 짓고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성호 이익의 유고를 읽고 성호와 같은 실학자가 되기로 각오했고, 후에 실학을 집대성한 큰 학자로 우뚝 섰다. 당파나 신분을 따지기를 원치 않았고, 주자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생에 걸쳐 경학 연구를 했으며, 높은 지위에 올라 힘 있는 관료가 되어 세상을 한번 개혁해보자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다산의 벗 중 이벽은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시대는 어떤 시대인지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정약용이 태어난 1762년은 영조가 즉위한지 38년이고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은 해이기도 하다. 주변의 정세를 보면 청나라에는 뛰어난 황제였던 건륭제가 있었고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시대였다. 세계적으로 보면 다산보다 6살 위였던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음악가 모차르트가 처음으로 음악 연주여행을 시작한 시기였다. 정약용이 사망한 1836년은 ’종의 기원‘으로 유명한 찰스 다윈이 5년간의 비글호 탑승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해이기도 하다. 그 즈음은 제국주의가 한참 세계를 휩쓸고 있었지만 조선에는 아직 세계 열강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시기이다. 이렇다 할 전쟁이 없던 시기였는데, 평화의 시대였고 그래서 정약용은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아쉬운 것은 청나라와 일본이 당시에 뛰어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조선은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 큰 통로가 천주교여서 당시 정약용의 인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던 천주교 박해로 통로가 막혀버렸던 것이고 그래서 폐쇄적인 조선은 결국 제국주의에 의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