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에르노의 《부끄러움》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아니 에르노의 여덟 번째 소설로, 열두 살 때 노동계층 부모와 기독교 사립학교 사이의 간극을 체험하고... 비채는 모던&클래식 시리즈를 통해 《부끄러움》을 내며, 이 작품이 작가 아니 에르노에게 갖는 의의를 소개한 신수정 문학평론가의 해제와 이재룡...
1. 아니 에르노와 자전적 글쓰기
아니 에르노가 1997년 발표한 소설이다. 아니 에르노는 1974년 <<빈 장롱>>으로 등단하여 2019년까지 20여 편의 소설과 5편의 대담집을 발표했다. <<빈 장롱>>(1974), <<그들이 말한 것, 혹은 말하지 않은 것>>(1977), <<얼어붙은 여자>>(1981)은 이른바 초기 3부작으로, 에로노의 자전적 소설로 분류된다. 그러다 1980년대 프랑스의 문학적 분위기 즉 거대담론이 서서히 내파되며 작가의 죽음이나 일인칭 글쓰기가 대두되던 시기와 맞물려 에르노의 글쓰기는 ‘자적적 글쓰기’로 변모한다. 1983년 <<남자의 자리>>나 1989년의 <<한 여자>>는 프랑스의 소도시에서 가난하고 천박한 일평생을 살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소재로 한다.
한편 1992년에 발표한 <<단순한 열정>>은 작가 자신의 사랑 체험을 기록한 것인데, 중년의 여교수가 외국인에 유부남인 남자와 맺은 불륜을 다룬다. 작가를 향한 윤리적 비난이 쇄도했던 이 소설 이후 오년의 침묵 후 나온 소설이 <<부끄러움>>(1997)이다. 사회의 미풍양속이 용납하지 않은 연애사를 낱낱이 밝히고 집중 포화를 당하자, 작가가 다시금 꺼내든 자신과 부모의 삶의 이야기는 하나의 정면 돌파처럼 여겨진다. 이 소설에서는 작가가 자기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은밀한 치부를 절절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이제 더 이상 허구의 가면 뒤에 숨기를 거부하는 작가가 반드시 거쳐야 했을 정면 승부였다.
사람은 다들 그 자신의 살아 온 나날들을 통해 쌓아 온 기억과 경험들이라는 빙산을 가지고 있고 보여지는 성격이나 모습은 그 빙산의 일각이라고, 어떤 유명한 심리학자는 말했지.
그 어떤 무의식 저편의 아 자신과 보여지는 내가 결코 분리 될 수 없다고, 그 말에 아주 반대하지도 아주 동의하지도 않고 살아왔는데, 이 책을 읽고 나는 나의 의식의 수면 아래로 잠잠히 가라 앉아 있었던 어린 나와 아주 당황스럽게 마주하고야 말았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두껍지 않은 책을 읽으며 나는 세상에 내 가족과 내 동네 밖의 세게란 존재하지 않았던 어린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주인공의 부모에게는 그저 어느 주말의 흔한 부부싸움 이었을지 모르지만 어린 주인공에게는 세상이 무너지는 공포와, 대처방법을 모르는 당혹감 같은 감정들 때문에 그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 어떤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