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채 그저 빌기만 하는 여성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전아’, 유서 있는 집안의 딸로 미적 재능까지 겸비했지만, 죄악 망상증에 빠져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처지이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토록 깊은 죄의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갇혀 있는 것일까?
태어날 때부터 연약했던 ‘전아’는 큰고모의 기독교적 교육관에 따라, 병적일 정도로 가혹한 규율과 압박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항상 정숙한 여인으로서 행동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식사 전에는 미동조차 허락되지 않는 긴 기도를 행해야 했다. 그들이 행하는 기도는 사랑하는 예수님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가 아니었다.
불친절한 소설은 읽는 내내 불편하다. 한무숙의 글이 그러하다. 한번 읽고 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처음 ‘감정이 있는 심연’을 읽었을 때 사실 무슨 내용인지 감이 안 왔다. 어렴풋이 사랑 이야기인가 싶은데 뭔가 무겁고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사건이 섞여 있고, 시간이 왔다갔다 한다. 글을 이해하려 한 번 더 읽었고, ‘나’를 이해하려 두 번 더 읽었으며, ‘전아’를 이해하려 세 번을 더 읽어야 했다. 왠만한 장편소설을 읽는 시간 정도를 할애하고 나서야 나는 한무숙의 글을 ‘읽었다’라고 할 수 있었다. 나의 독후감은 친절하지 않은 소설의 친절한 해설(?) 정도가 될 것이다. 이야기는 전아가 있는 정신병원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청년은 안심한 듯이 히쭉이 웃고 손을 내밀었다. 기다랗게 자란 손톱 밑에 새까만 때가 끔찍스럽게 끼어 있었다.
청년의 억센 악수에서 놓여 별동 안으로 발을 옮기며 나는 마음이 자꾸만 안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청년의 출현이 그때껏 내 내부에서 부풀어 오르며 있었던 감정을 중단시켰던 것이다.
‘나’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그녀, 전아가 있는 곳은 다름아닌 정신병원이다. 처음 청년의 모습을 만났을 때, 그래서 이게 뭐 정치 소설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정치 사회에서 도망쳐온 미치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러 오는 길은 그 곳이 어디든 간에 감정이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다. 감정이 있는 심연은 그녀를 만나는 매 때, 어느 장소든 간에 비바람에 휘몰아치는 것처럼 세차게 흔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장소의 초입에서 만난 미치광이 청년은 이곳이 어떤 곳인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깨우쳐주며 ‘나’의 마음을 잠재우고 있다. 사랑이라는 비현실적 감정에서 병원, 그것도 정신병원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벽을 알려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미치광이는 사랑하는 그녀, 전아의 나이와 비슷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