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오늘날의 설교가 (여전히)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가?
1. 거룩한 난센스?
기독교 복음은 아주 어리석어 보이고 완전히 난센스다. 하지만 그 점이 바로 기독교 설교의 핵심이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문명이 발달한 21세기에 이 모든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것이 없다고 생각되지 않을까? 참으로 기독교의 복음은 아주 어리석어 보이고 완전히 난센스다!
2. 사회 과학 분야에서 제기되는 비평
정치적, 경제적 및 문화적인 변화 이외에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모더니즘 역시, 쉽게 정의내리기 어렵지만 설교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변화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이제 모더니즘 사화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로의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하는 중이다. 사회 과학의 관점에 비추어 볼 때 기독교 설교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이 하나 있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이러한 문명사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심하게 고려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강단에서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무관심한가?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파도 앞에서 새로운 설교의 내용과 방법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하는가? 그들은 과연 새로운 셋째 밀레니엄의 입구에서 자기들 앞에 모인 회중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가?
3. 커뮤니케이션 과학분야에서 제기되는 비평
1) 이미지 문화
오늘날 시청각 이미지가 현대 사회를 압도하고 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취침을 위하여 소등하기까지 수많은 이미지들이 때로는 동시적으로 때로는 순차적으로 우리의 관심과 주의를 잡아끌려고 경쟁적으로 물밀 듯이 쇄도한다. 오늘날 이미지는 사실상 우리 실존의 모든 영역을 장학했다. 결론적으로 “따뜻한” 커뮤니케이션이 “차가운” 커뮤니케이션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뒤로 물러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본질적으로 논리적이며 선형적이고 연속적인 설교가 영적인 지식의 소통을 위하여 인간의 직관을 자극하고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활용하는 설교로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제 1장 오늘날의 설교가 (여전히)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가?
1. 거룩한 난센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로마 지배 시대에 최악의 형벌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건을 “good news” 복음으로 설명하고 있는 기독교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난센스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것이 기독교 설교의 핵심이다.
현대 지성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십자가 구원의 사건을 복음으로 그대로 설교해야 하는 설교자들에게 청중과 텍스트 사이의 모순으로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중 략>
설교 심포니 느낀점
오늘날의 설교가 여전히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설교학에 대한 책이지만, 읽는 내내 마음이 뜨거워 졌다. 머리로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 책의 내용에 공감이 된 것이다.
우리의 설교가 과연 미래를 기약할 수 있을까? 미디어에 정복 당하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지가 주입된 채로 살아가는 현대인들, 특히 SNS에 열광하고 심취하고 무의미하지만 재미있는 사건과 이미지를 늘 수시로 접하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설교란 얼마나 따분하고, 재미가 없으며, 시간 낭비처럼 느껴 지겠는가! 매주 청소년들이 예배 드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느꼈던 점이 고스란히 설명 되고 있었다. 또한 청년 지식인들에게 설교는 얼마나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는 듣기 싫은 부모님의 잔소리와 같이 들리겠는가? 어르신들에게는 얼마나 지키지 못할, 지킬 수 없는 약속처럼 설교가 들리겠는가? 어떻게 하여야 이 모든 세상 권세 잡은 자의 계략인지 모르고 이미 세뇌 당한 우리 현대인들의 심령을 깨우며, 인간 본성을 뒤흔들어 다시금 십자가 앞으로, 패배와 무기력과 실패의 상징인 십자가 앞으로 이끌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심령에 다가오면서, 나부터 먼저 내 모든 힘과 지식을 십자가 앞으로 이끌어야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