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글을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내가 과연 쓰고 있는 것이 형식에 맞는 것일까 따위를 고민하는 것이다. 과거 써본적이 있긴 하지만 글의 서두를 떼면서 느껴지는 그 아득함이란. 그래서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말로 나의 답답함의 빗장을 조금 열어본다. 내가 과연 읽었던 소설들 중에서 어떤 걸 택해야 그런 대로 문체나마 흉내낼 수 있을까, 따위를 고민하며 멍청하게 있는 동안 매정한 날짜는 날 기다려주지 않고 훌떡 날아가 버렸다. 그런 시간에 야속함을 표하며 눈을 흘기다가 집에 있는 거 하나 뽑아서 쓰자, 라고 정말이지 막연하게 생각해 버렸다. 그래서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소설은 ‘기재기이’. 상당히 얇은 분량이라 당연히 내 눈길을 끌며 자신을 선택하라고 교태롭게 유혹하고 있어서 기꺼이 선택한 이 책은, 하지만 얕보며 시작하려는 내 손길을 부들부들 떨리게 하고, 나의 게으름과 재주 없음에 한숨을 보내게 만들고 있다.
‘기재기이’에 속해있는 이야기들은 ‘꿈’과 ‘친구’와 ‘기이한 인연’ 그리고 ‘만남’ 등을 소재들로 우의적으로 현실 속의 사회상을 비판하고 있다. 죽어라고 읽었던 소설이라 작품 내용이야 알고 있지만 단순한 ‘안다’ 와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히 다른 의미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마치 아름다움을 ‘인식한다’ 와 아름다움에 ‘끌린다’는 것이 다르듯이 말이다.
‘안빙목유록’ 에서 안빙은 꿈속에서 꽃의 나라를 유람하고 돌아왔다고 했다. 거참, 그렇게 소소한 내용까지도 다 기억하고 있다니-놀랍구먼, 하고 입맛을 다시다 문득 그가 부러워졌다. 비록 그는 그 꿈이 요사스럽다 하여 다시는 그 정원에 발도 들이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고 하지만 말이다. 꿈이란 것은 수면 상태가 가장 깊이 들어갔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무슨 램 수면이라던가-하는 전문적인 용어를 써서 tv에서 설명했었지만 관심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들으면 하루 이상을 기억하지 않는 나의 천부적 자질로 인하여 지금은 가물가물 흐려져 뿌옇게 변해버렸다.
요즘 내가 자주 접하는 인터넷 사이트의 기사들을 보면 영화, 소설보다 극적이어서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한때 유행했던 엽기의 열풍이 이제 일상이 되어 버린 건 아닌지. 자극도 잦아지면 무디어지듯이, 이젠 그런 기사들도 많이 무디게 다가온다. 21세기가 되면 자동차가 날고, 전화는 항상 얼굴을 보면서 얘기할 줄 알았건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런 기사들뿐이었다. 奇異……. 이런 상황에서 기이하다고 제목까지 기이를 붙인 이 책은 얼마나 기이하게 느껴질까.
고전을 접하면, 사람보다 오래 살았던 책에 대한 존경심으로 한 장 한 장 넘겨보지만 막상 몸에 와 닿지 않을 때가 많다. 솔직히 말하자면 고전읽기는 늘 나에게 부담이 되었다. 글자 하나하나 텍스트를 읽는 것은 아무런 힘도 들지 않았으나, 그것에 담겨있는 내용이나 배경 그리고 시를 이해하기엔 내 능력이 너무 모자란 탓이었다. 그런 나에게 무턱대고 “원문”을 읽으라고 하는 선생님은 너무 야속하기만 했다. 한번 읽고나면 머릿속은 어느새 혼돈의 상태가 되어버려 다시는 책을 펼치지 못하게 했던 그런 책들이 古典이었다.